그로부터 반년쯤 지난 2005년 11월, 김영주씨는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회사에 사표를 던진 뒤, “가야 할 것 같다”라는 심정으로 저지른 여행이었다. 그녀는 2006년 3월 다시 한번 캘리포니아를 찾았다. 첫 번째 여행이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여행은 책을 쓰겠다는 목적을 안고 출발했다. 그녀의 데뷔작 〈캘리포니아〉(안그라픽스)는 그렇게 나왔다. 그녀는 책 서문에 “이 책을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달랑 여행가방 하나 들고 훌쩍 그곳으로 떠나게 된다면 나의 작은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라고 적었다.
김씨는 현재 〈캘리포니아〉 〈토스카나〉 〈뉴욕〉 등 여행서 세 권을 쓴 전업 작가다. 그녀에게 ‘나만의 여행법’을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면서 하이톤으로 깔깔대던 그녀가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메일 한 통을 보내왔다. ‘나름으로 정의 내린 ‘머무는 여행’의 실천 사항들’이라고 이름 붙은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미리 상상의 바다에 빠진다. 그 도구로 가장 적합한 것은 세 가지. 여행할 곳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과 영화 집중 탐구. 감성적 기대치를 높여놓으면 두려울 게 없다. 2. 부엌 있는 숙소 구하기, 혼자 다니기, 한 지역에 오래 있기, 마음 내키는 대로 그날의 일정 짜기, 바쁘지 않기.”
가수 이상은씨에게는 삶 자체가 여행이다. 스타의 길을 스스로 때려치운 20대 때 그녀는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30대 때는 런던에서 유학했고,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음악을 했다. 그녀는 지난해 베를린에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초 ‘엄마 집’에 칩거한 채 〈삶은 여행…이상은 인 베를린〉(북노마드)을 써 들고 나타났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했지만, 목적지나 방식은 이씨에게 온전히 맡겨진 여행이었다. “덕분에 내 영혼이 조금 더 자랐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역시 ‘나만의 여행법’을 물었다.
“패키지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이 방식이라면 방식일까. 패키지 여행이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자유롭게 낮잠 실컷 자고 현지인과 느릿느릿 어울리고 싶다. 시간 개념을 좀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 아닌가.”
김영주씨나 이상은씨의 여행 스타일이 ‘비우기’에 가깝다면 이재범씨는 ‘가득 채우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다. 이씨는 대학(경기대 인문학부)에서 교양과목으로 ‘역사와 문화유산’을 강의하는 교수다. 그에게 그리스는 “가서 봐야 할” 곳이었다. 안식년을 맞아 그는 차근차근 여행을 준비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을 듣는 등 마음을 그리스에 맞추는 식으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읽은 신화와 역사책은 막상 여행 계획을 짜는 데는 도움이 못 됐다. 음식점과 숙소를 정리해놓은 여행서 또한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는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이씨는 결국 원고지 1000장짜리 ‘나만의 여행 안내서’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B5 복사용지에 출력해서 23박24일간의 배낭여행 내내 들고 다녔다.
“숙식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책에서 봤던 모든 곳을 가본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연세대 학생이 ‘수학여행 왔느냐’며 놀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홀로 다녔기 때문에 가능했던 여행이었다.”
귀국할 때 이씨의 가방은 그리스에서 산 책과 음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원래 책 쓸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여행담을 주워들은 주변 인사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의 그리스 여행〉(앨피)은 이씨만의 ‘수학여행식 배낭여행’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수확물로 남게 됐다.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미래인) 시리즈를 쓴 김남희씨와 〈끌림〉(랜덤하우스코리아)의 저자 이병률씨는 앞의 세 사람에 비하면 이력이 꽤 붙은 여행가다. 김씨는 대학 졸업하던 해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작가의 길을 택했다. 그녀는 여행을 위해 등산과 사진까지 정식으로 배운 ‘프로’다. 그녀 또한 이재범 교수마냥 여행 준비를 철저히 하는 편이지만, 막상 현지에서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천천히 여행하다가 걷고 싶은 곳이 나타나면 큰 배낭을 내려놓고 며칠씩, 때로는 한 달씩 걷는다. 많게는 하루에 14시간까지 걸어본 적이 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에게 여행은 자기와의 대화 시간이다.
“여자 혼자 다니면 겁도 나고, 그래서 날 저물면 잘 돌아다니지 않거나 길을 물을 때는 여자나 노인한테 여쭙는 편이다. 그래도 좋은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게 내 모토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를 성찰하고, 타인을 만나고, 자연과 대면하고 싶다면 혼자서 여행하라.”
시인이자 책 편집자인 이병률씨가 쓴 〈끌림〉은 여행서 ‘계보’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기행문과 아포리즘을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그의 감각적인 문체가 독자를 빨아들였다면, 이씨가 직접 한, ‘끌림 스타일’이라는 조어가 생길 정도로 깔끔한 책 디자인은 여행서 편집자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됐다. 그에게 ‘나만의 여행법’을 물었더니, “혼자 가는 것”이라는 말이 물음과 동시에 튀어나왔다(이상은씨를 빼면 대부분이 혼자 여행을 좋아했고, 추천했다).
“여행은 해프닝 같은 거다.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숙소 예약도 안 한 채 막막한 상태로 가는 걸 즐긴다. 혼자서 거리를 어슬렁거리거나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본다…. 소설이 재미있지, 남이 쓴 여행기는 재미없어서 잘 안 읽는다. 운이 좋아서 내 책이 팔리는데, 여행서 읽지 말고 여행 실컷 다녀라. 그게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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