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제공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각종 여행 책자를 내려다보며 백승기 사진팀장이 한마디 했다.
“내가 한창 여행 다닐 때는 노란 책 한 권씩만 끼고 다녔는데….”
 
한때 여행자들의 배낭 한 귀퉁이에 꼭 들어 있던 국내 출판사의 〈100배 즐기기〉 시리즈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2003년 여행자의 바이블로 통하던 〈론리 플래닛〉(안그라픽스)이 한국에 상륙했고, 〈Just go〉(시공사)나 〈자신만만 세계여행〉(삼성출판사) 시리즈 따위가 쏟아져 나오면서 국내 여행 가이드북 시장은 한때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겨우 수년 전 일이다.

지난 6월6일 아침, 황금연휴를 맞아 북적이던 김포공항 출국장. 도쿄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김도훈씨(28·가명)의 손에는 〈도쿄 락〉(로그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록밴드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씨가 쓴 이 새로운 종류의 도쿄 여행서에는 여행서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정보는 별로 없는 반면 일본 뮤지션과의 인터뷰, 이성우씨가 도쿄에서 잘 가는 장소 등이 꼼꼼하게 실려 있다. 김씨는 연휴 동안 신주쿠와 시부야에 머물며 일본 음악에 푹 빠져 지내다 오겠다고 했다. 이번이 세 번째 일본 여행이지만 그는 여행 가이드북을 산 적이 없다. “여행 정보는 ‘인조이 재팬’(네이버 일본 여행정보 사이트)을 비롯한 몇몇 동호회 사이트에 널려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여행서를 담당하는 안정례 과장은 “최근에는 여행 안내서보다 작가의 느낌을 담거나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풀어낸 여행 에세이가 인기다. 해외여행이 보편화하면서 관광 중심 여행에서 테마 여행으로 여행 취향이 변했기 때문으로 본다. 직접 떠나지 못한 이들이 책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여행서 시장이 몇 년 사이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다. 여행 가이드북만 존재하던 시절, ‘비소설’ ‘에세이’ 등의 장르로 분류되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테마 여행서가 반격을 시도한 지 수년째. 이제는 새롭게 열린 테마 여행서 시장이 전통적인 여행 정보서 시장을 압도한다. 예스24의 판매 부수를 살펴보면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 에세이의 판매 비율이 이전에는 7 대 3이었으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현재는 4 대 6까지 뒤바뀐 상태다. 6월 넷째 주 여행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 〈길 위의 칸타빌레〉 〈정재형의 파리 토크〉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끌림〉 〈유럽의 걷고 싶은 길〉 같은 테마 여행서가 싹쓸이했다. 

테마 여행서, 여행 정보서 수요 앞질러

여행서의 진화라고 할 만한 이 새로운 현상의 개척자는 신미식·윤창호·이형준 씨 등 전문 여행사진가였다. 4~5년 전쯤부터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이후 시원한 풍경 사진에 짤막한 단상을 곁들인, 여행책 같기도 하고 사진책 같기도 한 책이 서점에 쏟아졌다. 하지만 이들의 책은 독자의 ‘글 읽는 맛’까지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일부 까다로운 독자는 이 무렵 국내에 번역 소개되기 시작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여행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여행 책의 변신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다. 배낭여행을 경험한 세대가 이제는 도시별 혹은 테마별 맞춤형 여행 붐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여행을 휴식만이 아닌 자신에 대한 투자로 생각하고 여행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 첫 세대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인터넷 블로그 문화의 확산도 테마 여행서 붐 조성에 한몫했다. 그렇게 일반인이 여행 책 저자로 등장하면서 이른바 여행 책의 ‘프로암(프로+아마추어) 시대’가 도래했다.

초창기의 테마 여행서는 도쿄·뉴욕·홍콩 등 ‘인기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 가이드북 형태에 개인의 여행 경험을 담은 에세이와 사진을 덧붙이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2~3년 전부터 여행서의 장르가 세분되었다.

우선 서점에 가보면 좌판을 죽 차지한 ‘예쁜’ 여행서들을 볼 수 있다. 톡톡 튀는 문장과 사진, 그리고 감각적인 책 디자인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이 신종 여행서의 ‘원조’ 격으로 시인 이병률씨가 2005년에 쓴 〈끌림〉(랜덤하우스코리아)을 들 수 있다. 이씨가 10년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이 책은 시인 특유의 맛깔스러운 문장과 감각적인 사진 덕분에 테마 여행서 붐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15만 부가 팔렸다. 나아가 이 책은 ‘끌림 스타일’이라는 유행을 낳으면서 테마 여행서 디자인의 ‘절대 기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테마 여행서 붐을 타고 전문 여행작가도 속속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생의 절반을 잡지사 기자와 편집장 등으로 일했던 김영주씨는 2006년부터 〈캘리포니아〉 〈토스카나〉 〈뉴욕〉(이상 안그라픽스)을 1년에 한 권꼴로 써냈다.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전업 여행작가를 선언한 손미나씨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웅진)와 〈태양의 여행자〉(삼성출판사)를 썼다. ‘바람의 딸’ 한비야씨와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미래인) 시리즈를 쓴 김남희씨 등도 확실한 독자층을 거느린 전문 여행작가다.

가수 이상은(〈삶은 여행…이상은 인 베를린〉), 박기영(〈박기영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 정재형(〈정재형의 파리 토크〉)과 배우 배두나(〈두나’s 런던 놀이〉 〈두나’s 도쿄 놀이〉) 등 연예인도 독특한 관점과 스타일의 여행서를 펴내며 인기를 얻었다.

라이프스타일이나 체험 여행, 오지 탐험, 걷기, 음식 등 하나의 테마를 정해서 특정 독자층을 겨냥한 여행서도 우후죽순으로 출판된다.

그래픽 디자이너 박훈규씨는 20대 후반에 30만원을 들고 한국을 떠난 뒤 시드니와 런던, 에든버러 등지에서 5000여 장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400여 일간 여행했던 경험담을 〈언더그라운드 여행기〉(안그라픽스)에서 풀어놨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배낭여행 전도사’인 박준씨는 배낭여행 체험을 담은 책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온 더 로드〉(넥서스북스)와 〈네 멋대로 행복하라〉(삼성출판사) 등으로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대학에서 스와힐리어와 아프리카 문화를 강의하는 김광수 교수와 그의 열여덟 제자가 한 달간 아프리카를 여행한 기록물 〈19인의 아프리카〉(부표)와, ‘Jin’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낸 스물네 살 여대생의 배낭여행 연애기 〈호텔, 마다가스카르〉(시공사), 정상근씨의 〈80만원으로 세계여행〉(두리미디어), 김동영씨의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달) 등도 자기 체험을 소재로 해서 화제를 모은 책이다.

일반인에서 연예인까지 다양한 저자

몇몇 디자이너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는 자기 전공을 십분 살린 여행서를 선보였다. 건축기사 오영욱씨는 2005년 스케치 형식의 그림과 카툰을 조합한 여행기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샘터)가 독자에게 호응을 얻은 뒤 아예 필명을 ‘오기사’로 정하고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예담)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화가 최수진씨는 사진 대신 자신의 그림을 넣은 〈베트남 그림 여행〉(북노마드)을 펴냈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 가장 큰 고객은 20~30대 직장 여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행서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골드 미스’라 불리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쇼핑, 음식 여행 가이드북을 겨냥한 테마 여행서가 없을 리 없다. 김선경의 〈나만의 스타일 여행〉(안그라픽스),  박성윤·김남욱의 〈동경오감〉(삼성출판사), 채건호의 〈Mr. 쇼퍼홀릭, 배낭으로 유럽을 쇼핑하다〉(고즈윈), 김신회의 〈도쿄 싱글 식탁〉(넥서스), 김은희의 〈접시에 뉴욕을 담다〉(그루비주얼), 양진숙의 〈빵빵빵 파리〉(달) 등이 여성 취향을 충족시키는 여행서로 꼽힌다.

하지만 이런 백가쟁명식 테마 여행서 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출판사만 다르지 장정이나 내용까지 비슷한 책이 많다는 지적은 출판계에서 오래전부터 나왔다. 일반 블로거가 여행서 시장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책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생겨나고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일반인이 쓴 책은 내용이나 담고 있는 정보가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과정이 책을 새로 쓰는 것만큼 힘들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가볍고 예쁜 책만 팔린다” 비판도

테마 여행서의 또 다른 축으로는 ‘여행 문학’이라 불릴 만한 묵직한 번역서가 존재한다. 프랑스의 ‘신철학’을 대표하는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아메리칸 버티고〉(황금부엉이)는 ‘반반미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가 1년간 미국 대륙을 누비며 지극히 냉철한 시선으로 미국이라는 텍스트를 독파한 지적 보고서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이 쓴 〈지중해 오디세이〉(민음사)에는 지중해 지역에 대한 역사 지식과 인문학 견문이 녹록지 않은 수준으로 녹아 있다.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사색기행〉(청어람미디어)은 치즈와 음악,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 대한 저자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으로 가득 찬 책이다. 그러나 외국에서 반응을 얻었던 이런 묵직한 여행서가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별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여행서 전문 출판사 북노마드 윤동희 대표는 “외국에는 다운시프트(고소득이나 빠른 승진보다는 비록 저소득일지라도 여유 있는 직장 생활을 즐기면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경향) 같이 삶의 가치를 드러내거나 문학적 소양이 깊은 여행서가 환영받지만, 아직 국내 독자는 편집이나 디자인이 깔끔하고 가벼운 읽을거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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