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왔지만,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는 아직 현판조차 내걸지 못하고 있다. 3월29일 이석태 위원장은 특조위의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정부가 3월27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을 발표하면서, 특조위가 유명무실해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조위는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되어 있는 독립 조사기구다. 최대 1년9개월 동안 진상 규명과 재난사고 안전대책의 구축을 총괄한다. 당초 유가족들이 원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정치권이나 행정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체 조사권한을 가지고 있다. 오랜 논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별법의 ‘실체적 결실’인 셈이다.

ⓒ연합뉴스1월16일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세금 도둑’ 발언은 특조위를 결정적으로 흔들었다.

문제는 정부가 내놓은 시행령안이 통과될 경우 특조위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초 특조위는 2월17일 자체 의결을 통해 인력 125명(정무직 5명 포함), 예산 192억원 규모의 시행령안을 해양수산부에 제출했다. 지난해 12월부터 기획재정부, 행정자치부 등과 여러 차례 조정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정부에서 입법 예고한 시행령안에는 특조위의 전체 인력이 90명으로 줄었다(아래 표 참조).

규모만 줄어든 게 아니다. 실제 권한과 조사 범위도 대폭 축소된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포괄적으로 명시해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조항(특별법 제5조)이 시행령안(제5조)에서는 ‘정부조사 결과의 분석 및 조사’로 국한되었다. 진상 규명과 함께 중요한 부분인 안전사회 구축도 ‘4·16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시행령안 제6조) 분야로 축소되었다. 특별법에서 ‘재해·재난의 예방과 대응방안 마련 등’으로 명시한 위원회의 업무 범위를 정부가 대폭 줄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특조위에서 정부 공무원이 민간 조사위원보다 더 많이,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특조위는 당초 조사 업무는 민간이 맡고, 행정 지원은 공무원이 맡는 2원화 체계를 계획했다. 그러나 정부 시행령안은 특조위 전체 조직을 해수부에서 파견된 기획조정실장·기획총괄담당관이 지휘하게끔 되어 있다. 조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 조사기구의 권한과 조직을 좌우하는 셈이다.

세월호 특별법의 구조적 한계가 여기에 있다. 여야 간 줄다리기 끝에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은 사실상 갈등을 유예한 구조다. 특조위에 최대 120명(정무직 공무원은 제외)까지 직원을 둘 수 있다는 조항만 있을 뿐, 세부 규정은 시행령에 맡기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금과 같은 정부의 행동이 어느 정도 예상된 움직임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별법이 갈등을 덮고 갔다면, 그 법의 시행 과정에서 정치권이 행정부를 견제해야 한다. 예상된 행정부의 저항이라면, 정치권에서 적극적으로 특조위의 독립성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권에서는 특조위를 둘러싼 갈등만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예가 1월16일 새누리당 김재원 당시 원내수석부대표의 ‘세금 도둑’ 발언(〈시사IN〉 제385호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평형수를 빼려고?’ 기사 참조)이다. 김 전 수석은 당시 세월호 특조위 설립준비단이 준비 중이던 직제안과 예산안에 대해 ‘세금 도둑’이라며 비판했다. 정부 공무원에게 여당 지도부의 발언은 효력이 있었다. 특조위 관계자는 “세금 도둑 발언 이후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와의 모든 논의가 전면 중단되었다. 이 발언이 없었다면 벌써 특조위 활동이 시작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은 〈신동아〉 인터뷰에서도 세월호 특조위에 대해 “호의호식하려고 모인 탐욕의 결정체로 보였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특조위원의 돌출 행동도 분위기를 어지럽혔다. 새누리당 추천을 받은 황전원 위원은 김재원 의원의 세금 도둑 발언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특조위 내부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라기보다 ‘내분이 있다’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되었다. 이석태 위원장이 활동 중단을 선언한 다음 날인 3월30일에도 황 위원은 “특조위 출범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지 마라. 소모적인 투쟁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치 쟁점화에 나선 쪽은 오히려 황 위원이었다. 이날 황 위원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하고, 국회 기자단 앞에 소개한 인물이 새누리당 권은희 대변인이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특조위 위원이 여당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기자회견에 나선 것이다.

특조위에 대한 정치 공세의 공통점은 세월호 특조위를 ‘돈 문제’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보상·배상, 특례입학 등에 대한 루머가 유가족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킨 것처럼, 특조위에 편성되는 예산이 ‘국민이 낸 세금’이라는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비용 문제 앞에서 특조위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사실관계로 특조위를 흔들기도 했다. 황전원 위원은 3월30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9·11 조사위원회의 경우 80명의 직원이 활동해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라며 세월호 특조위의 규모가 필요 이상으로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9·11 조사위원회 80명은 오직 진상조사 업무만 전담했다. 행정·사무, 안전사회 조직 등은 따로 있었다. 게다가 진상조사에만 1500만 달러(약 165억원)를 투자한 9·11 위원회도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시사IN〉 제378호 ‘9·11 위원회의 한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사 참조). 전 세계 대형 재난사고 수습 과정을 비교·연구한 참여연대의 백가윤 간사는 “9·11 조사위는 미국 내에서 ‘한계가 많았던 위원회’로 평가받는다. 9·11 조사위 공동 의장이었던 토머스 킨과 리 해밀턴도 조사위 뒷이야기를 다룬 〈전례 없는 이야기〉라는 책에서 예산 부족이 활동에 어려움을 가져왔다고 밝혔다”라고 지적했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처럼 할 수는 없나

특조위가 참고해야 할 모델로는 일본 의회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조사위원회나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산불 왕립위원회가 꼽힌다. 이들 조사위의 특징은 무엇보다 피해자를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피해자 대표자가 조사위원으로 직접 참여한 후쿠시마 조사위는 간 나오토 당시 총리를 비롯해 38명이 참고인 조사를 받았고, 소위원회와 공청회 과정이 영문 자막과 함께 인터넷에 생중계되었다. 173명이 사망하고 2030가구가 전소한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주 산불 사고도 재난 발생 2주 만에 조사위(왕립위원회)가 구성되어 17개월 동안 진상조사를 진행했다. 청문회나 최종 결과 보고서뿐 아니라 간담회·공청회에 제출한 서면 의견서까지 모두 온라인에 투명하게 공개했다. 피해자가 충분히 납득할 만큼 정보를 공개한다는 원칙이다.

9·11 조사위원회를 다룬 〈위원회:9·11 조사의 검열받지 않은 역사〉의 저자 필립 셰논은 지난해 12월9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국제 워크숍에서 “국가적 비극에 대한 조사는 조사 기간이나 부족한 예산으로 제한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특조위는 공식 출범 전부터 흔들리고 있다. 인력은 줄었고, 독립성은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특조위로서는 여론에 호소하며 저항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의 결실이 표류하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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