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법정에 들어선 김상환 부장판사는 먼저 선고에 임하는 소회를 밝혔다. “한 사람의 죄와 벌을 다루는 형사재판은 끝없는 숙고를 요한다. 알 수 없는 깊은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재판부는 헌법과 법률, 기록상 증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했고 그 결론을 담담히 말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비롯해 100석이 넘는 법정을 채운 사람들이 김 판사의 입에 집중했다.

먼저 쟁점이 된 부분부터 짚었다. 김 아무개 국정원 직원의 이메일에서 발견된 ‘시큐리티 텍스트 첨부파일’ 등의 증거 능력에 대한 판단이었다. 파일에는 트위터 팀(안보5팀) 소속 직원의 이름 앞 두 글자와 트위터 계정, 비밀번호, 장소 등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X파일’이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부장 이범균)는 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당사자가 자신이 작성한 파일이라고 진술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형사소송법 제313조). 김 직원은 지난해 3월17일 원세훈 1심 때 증인으로 나왔다.


“(증인의) ‘내게 쓴 메일함’에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 등이 있는데 증인이 작성해 첨부한 게 맞나?”(검사)
“기억이 안 난다.”(김 직원)
“기억력이 조금 떨어지나?”(변호사)
“예.”(김 직원)

석 달 후 6월2일 김 직원은 또다시 증인으로 출석했다. 변호인 쪽이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의 증거 능력을 다투며, 해당 파일이 김씨 메일에서 나왔지만 김 직원이 작성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다. 김 직원은 검찰 조사 때와 달리 법정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증인 메일의 ‘받은 메일함’을 보면 IP 주소가 국정원인 메일이 147개였다. 국정원에서 본인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실 있죠?”(검사)
“그건 기억이 안 난다.”(김 직원)
“이메일 자체를 증인만 사용했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죠?”(검사)
“예, 그건 맞다.”(김 직원)

보다 못한 판사가 끼어들었다.

“헤더 정보라고 이메일을 열어보면 어디서 작성했는지 IP 주소가 나온다. 이 주소가 국정원 사무실인 걸로 확인됐다. 보낸 사람도 증인이고, 받는 사람도 증인이다. 누구한테 메일 계정을 빌려준 적도 없고 혼자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면 저 메일을 증인이 작성해서 증인에게 보냈고, 보낸 곳이 국정원 내 컴퓨터로 기록상 나온다. 자, 증인이 작성한 거 맞나?”(판사)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김 직원)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항소심 선고공판을 위해 9일 오후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원 전 원장은 이날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015.2.9

계속되는 ‘기억상실 증언’에 판사조차 참다못해 질문을 던졌지만, 1심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의 말에 손을 들어줬다. 원심은 김 직원 본인이 썼다는 진술이 없다며 문서에 담긴 기초 계정 269개뿐 아니라, 파생된 계정 모두를 증거에서 배척했다. 검찰 수사팀은 작성자를 특정할 수 없더라도 성매매 고객 정보 기록이 담긴 디지털 문서를 직접 증거로 본 대법원 판례와 상충한다며 반발했다. 결국 1심에서 인정된 국정원 트위터 계정은 175개뿐이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검찰 손을 들어주었다. 국정원 조직 및 구성원은 철저히 보안이 이뤄져 안보5팀이 아니면 알기 어렵다는 점, 국정원 IP로 잡히는 자기 자신에게 쓴 메일 대부분이 업무 시간에 작성된 점 등을 지적했다. 또 김 직원이 검찰과 법원에서 진술을 바꿀 만한 특별한 이유를 대지 않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만 한 점 등을 들어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은 김 직원이 작성한 파일이라고 봤다. 해당 증거를 인정하자 국정원이 정치·선거에 개입한 트위터 계정은 716개로 늘었고, 트윗·리트윗은 모두 27만여 건이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엄단이 국정원을 살리는 길”

이어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인정하면서 선거 개입은 인정하지 않은 논리를 깼다. 1심은 국정원이 대선 이전부터 해오던 일상적 정치 관여가, 선거 기간이라고 당연히 선거운동이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능동·계획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는 입증을 검찰이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선거운동 시기를 판단하며 그 기간의 정치 개입은 자체로 ‘능동·계획적인’ 선거운동이라고 여겼다. 2012년 8월20일 이후 트위터 댓글 등을 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날은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다. 유력 대선 후보가 확정된 날부터는 보편적 관점에서 대선 국면 시작이라고 인식된다고 지적했다. 또 2심 재판부가 분류한 바에 따르면(왼쪽 〈표〉 참조), 2012년 9월에는 전달에 비해 선거 관련 심리전단 글이 6배 이상 많아졌다. 2012년 10월 이후의 게시 횟수가 줄었다는 사정도 1심 재판부가 선거운동이 아니라는 근거로 들었지만 그 또한 적절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절대 숫자는 여전히 적지 않고(10월 3만2687건, 11월 1만89건, 12월 8264건), 여당 후보 지지·찬양 야권 후보 반대·비방 흐름을 유지했다(〈시사IN〉 제320호 “박근혜 실언할 때마다 조직적 ‘방어 트윗’” 기사 참조).

“최고 수준의 정보를 수집해 분석할 체계와 능력을 갖춘 국정원은 적어도 이 기간만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보다 무겁게 인식하고, 심리전단의 활동이 선거에 어떤 의미로 작용할지 점검하고 통제해야 하고 이를 할 수도 있었다.”(2심 판결문)


2심 재판부는 국정원 자체 평가를 되새기라고 주문했다. 증거로 제출된 2007년 국정원이 작성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보고서를 판결문에 인용했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 중에서도 ‘선거 개입’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 과정과 무관할수록 선거로 집약된 국민의 민주적 의지는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로 모일 수 있다.”

2심 재판부는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한 엄단이 국정원을 살리는 길이라고 밝혔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이종명 전 국정원 2차장이 한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군 출신인 이 전 차장이 ‘군은 전쟁을 준비하는 기관이지만 국정원은 현재 전쟁을 수행한다’라고 한 발언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문제된 특정 사이버 활동만이 관련 법률에 위반됨을 명백히 지적함으로써 국정원의 헌신과 노력이 본연의 업무 수행에 집중되도록 해 국민의 신뢰를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판결이라고 명시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법정 구속되었다. 이종명 전 차장은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은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선고 결과를 받아들고 서울구치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원 전 원장은 2월12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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