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6월의 거리는 또 어떤 ‘상상력’을 보여줄까. 스티로폼 계단을 쌓아 컨테이너 위에 올라선 시위대.

선거가 없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2002년, 2004년의 촛불집회와 구분되는 핵심이 이것이다. 미군 장갑차 사고로 촉발된 2002년 촛불집회는 연말의 대선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으로 터져나온 2004년의 촛불집회는 17대 총선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성난 민심은 표를 통해 심판했고, 제도권 정치는 거리의 정치를 수렴해 기능을 회복했다. 하지만 2008년에는 그럴 만한 공간이 없다.

야당도 실종됐다. 범한나라당계 정당이 185석을 점유한 가운데,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은 따로 집회를 연다, 촛불집회에 함께 한다, 갈팡질팡하더니 슬그머니 등원 시점을 재고 있다. 거리의 반응도 싸늘하다. 격려를 받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전·현직 의원과는 달리, 민주당 의원에게는 왜 나왔느냐는 힐난이 쏟아진다. 18대 국회는 개원하자마자 거리에서 ‘상징적인 탄핵’을 당했다.

그래서 다시 고비다. 6월10일의 ‘대폭발’ 이후, 촛불집회의 다음 단계를 모색하는 이들의 고민은 오히려 깊어간다. 현실적으로 이 이상 가는 에너지를 모아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제도권 정치는 여전히 거리의 정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눙치고 넘어가려는 듯한 모양새다. 기록적인 시위대가 운집한 다음 날인 6월11일, 이명박 대통령은 단지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라고만 말해 기대를 걸었던 시민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소수가 결정하던 ‘서울역 회군’ 시대는 갔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선거가 아닌 방법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받아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이기는 길일까. 시민 사이에서도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가장 온건한 이들은 ‘시민은 이미 이겼다’라고 생각하고, 가장 강경한 시민은 정권 퇴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두 ‘극단’은 아직은 소수파에 속한다.

최소한의 조건이 쇠고기 전면 재협상이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장관 몇 명을 제물 삼거나 박근혜씨를 총리에 앉히면 시민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리라는 정부의 기대는 거리에선 웃음거리다. “아무리 그래도 민심을 그 정도로 모를 리 없으니,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닐까”라는 반문이 나올 정도다.

거리의 시민은 지금, 쇠고기 재협상만으로 만족할 것이냐, 이참에 대운하와 공공서비스 민영화까지 모두 막아내느냐를 두고 논쟁 중이다. 쇠고기 하나만 가지고도 자율 규제니 추가 협상이니 표현을 바꿔가며 비켜가려는 정부와는 눈높이가 한참 다르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는 6월10일 정부에 제시한 최후 통첩에서, 6월20일까지 쇠고기 재협상을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어투는 강경하지만, 대운하와 의료 민영화 등이 빠졌다는 점에서 이마저도 현장에서는 ‘온건파’의 목소리인 셈이다.

가능할까. 예측하기 힘들다. 정부의 버티기식 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가두시위만 따져도 4주째로 접어드는 촛불집회의 동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여론도 언제 ‘집회피로증’을 호소할지 모른다. 민주노총·한총련 등 ‘깃발부대’의 구실도 변수다.

무엇보다 큰 변수는, 지금의 시위대가 조직화되기는커녕 이른바 ‘지도부’조차 인정하지 않는 다원적인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그 자신 386세대인 직장인 김의철씨(43)는 말한다.

“386은 자꾸 이 시위를 계속할 때인지 회군할 때인지를 고민한다. 1980년대에 ‘택’(지도부가 내리는 시위전술)에 따라 움직이던 관성이다. 하지만 이 시위대가 어디 집에 가란다고 가고 청와대 넘자고 하면 넘을 사람들인가. 열 몇 명 결정으로 수십만을 집에 보냈던 1980년 ‘서울역 회군’이 가능하던 시대는 갔다.”

지도부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시위대가 어느 수준까지를 승리로 받아들일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무엇이 이기는 것이냐’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시사IN 윤무영40일이 넘게 꺼지지 않는 촛불을 어떻게 갈무리할까. 정부보다 시민의 고민이 오히려 더 깊어 보인다.

돌이켜보면 촛불집회의 첫 번째 변곡점은 5월24일이었다. 겨우 200여 명의 시민이 처음으로 거리로 나섰고, 경찰은 호들갑을 떨며 이들을 강제 진압했다. 주말 동안 69명이 연행되면서 몇 백명 수준이던 시위대는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늘어났다. 두 번째는 5월31일이었다. 시위대 1만여 명이 청와대 진입로에서 전경과 대치한 이날,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여대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짓밟아 촛불에 기름을 부었다. 다음 주 주말의 72시간 연속집회와 6월10일의 수십만 인파는 그 결과다. 두 번 모두 경찰의 자충수가 상황을 키웠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어떤 모습일까.

‘집회피로증’ 여론에 시위대 고립?:정부가 기대하는 시나리오다. 바짝 엎드린 정부 대신 보수 언론이 ‘총대’를 멨다. ‘조·중·동’이 5월 내내 연이어 집어들었던 집회배후론·불법집회론·폭력시위론이 모두 여론의 냉대를 받은 이후 꺼내든 카드가 이것이다. 6월10일의 ‘대폭발’ 다음 날 중앙일보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는 사설을 썼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사설 제목은 ‘대한민국이 표류해선 안 된다’였다. 단골이었던 배후론과 폭력시위론이 쏙 들어간 대신, “이제 충분하다”라는 설득을 앞세웠다.

시위 참여 시민이 걱정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세 번째 변곡점’을 빨리 마련하지 않으면 피로해진 여론의 역풍이 불지 모른다. 집회 현장에서는 대책회의를 ‘무대책회의’라고 조롱하는 목소리도 높다. 5월31일 폭발한 시민의 분노가 계속 쌓여가는데도 대책회의가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동력을 낭비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대책회의는 자신만만하다. 여론의 역풍은 아직 기우라는 것이다. 실제로 매일 밤 경찰에 의해 도로가 봉쇄되는 삼청동·효자동 등 인근 주민마저도 촛불집회보다는 경찰에 짜증을 낸다. 대책회의 운영위원인 흥사단 권혜진 사무처장은 “청와대 진입로의 옥탑방 주민이, 자기 집을 언론의 촬영장소로 제공할 테니 경찰의 폭력진압 장면을 잡아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다”라고 소개했다. 그런데도 대책회의 내부에서조차 “집회 일정에 허덕여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 토론이 부족했다”라는 반성이 나온다.

시위 시민 체력 고갈로 자연 소멸?: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가두시위 3주째에도 시위 참가 시민의 분위기는 강경했다. “언제까지 촛불집회에 참가할 거냐”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될 때까지 간다. 변수는 우리가 아니라 정부다.”

집회의 주력은 밤 8시쯤 참가해서 11시에 떠나는 ‘생활인’이다. 경찰과 대책회의의 인원 추산을 봐도 이 시간대가 절정을 이룬다. 집회에 매일 참가해도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얘기다. 더욱이 이 시간대의 거리는 전경이 진압은커녕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시민광장’이다. 곳곳에서 문화 공연도 벌어진다. 직장인 정재용씨(40)는 “밤에 집회를 하니까 매일 나올 수가 있다. 집회 문화가 축제처럼 바뀌어 부담도 적다”라고 말했다. 대책회의 권혜진 운영위원은 “대책회의·경찰·기자나 지치지, 시민은 쌩쌩해요”라며 혀를 내둘렀다.

‘집단지성’의 상상력으로 돌파구 마련?:집회 현장에서는 열흘 넘도록 이어진 교착상태를 뛰어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6월10일에서 날이 바뀐 11일 새벽. 아직도 1만여 명이 남은 세종로 일대에서는 ‘두 개의 집회’가 열렸다. 대책회의가 설치한 무대에서 이루어진 집회가 한쪽에, 경찰이 깔아둔 컨테이너 장벽 앞에서 벌어진 ‘즉석 만민공동회’가 다른 한쪽에 있었다. 주무대는 후자였다. 만민공동회의 주제는 이른바 ‘비폭력’ 논쟁. 하지만 보수 언론의 보도처럼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논쟁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비폭력은 이미 합의가 끝났다. 문제는 ‘어떤 비폭력인가’이다. 닭장차 장벽과 컨테이너 장벽이라는 국가 폭력에 맞서, 시민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인권단체연석회의 최지영 활동가는 이 토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 시민은 5시간이 넘는 치열한 마라톤 토의 끝에 준비된 스티로폼을 쌓아 올려 컨테이너 장벽 위로 올라가 깃발을 흔들었다. ‘명박산성’이라 이름 붙인 컨테이너 장벽과, 그를 쌓아올린 권력에 대한 발랄한 조롱이었다. 물리력 행사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도 다양한 ‘돌파구’가 모색된다. 금융경제연구소 우석훈 연구위원이 내놓은 “주민소환제로 한나라당 지방자치단체장들을 하나하나 끌어내리면, 결국 그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릴 것이다”라는 제안은 다음 ‘아고라’ 등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조·중·동 광고 내리기 운동’도 날로 확산된다. 정부의 언론 장악 수단이라는 의혹을 강하게 받는 감사원의 KBS 특별감사가 시작되자, 다음 아고라에서는 6월11일 이후 KBS 본관에서 ‘촛불 인간띠 잇기’ 시위를 조직하는 등 온라인 특유의 순발력 있는 대응도 관찰된다. 광화문 시위에 참가한 박용진씨(29)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음 돌파구도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순신 동상에서 숭례문까지 촛불이 가득 채웠다. 1987년 이후 최대 인파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거다. 이쯤 되면 뭔가 반응이 나오는 게 정상적인 정부 아닌가.” 대책회의 멤버인 참여연대 안진걸 민생희망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모이는 집회를 40일 넘게 끌어오면서도 정부의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다시 ‘다음 국면’을 고민해야 하는 것도 쉽게 예상 가능했던 상황은 아닌 탓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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