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자본’은 필요할 때 노동자를 고용하고 필요 없으면 자르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가 유리컵을 만들다가 삽시간에 안경을 만드는 등 여러 일(기능)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특별히 사악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시장 상황의 변동에 ‘유연하게’ 따라가야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리컵 업체의 경우, 수요가 늘어날 때 더 고용한 노동자들이 해당 제품의 인기가 수그러들면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는 것이다. 또한 시장 전망이 괜찮은 안경 쪽으로 업종을 전환하려 해도 기존 노동자들의 제한된 기능(유리컵만 만들 수 있는) 때문에 여의치 않다. 시장 상황에 맞춰 고용 형태를 최대한 ‘유연하게’ 만들고 싶은 것은 자본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노동의 유연성(flexibility)’이다.

이처럼 자본에게 노동은, 마음대로 샀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상품’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노동자는 인간이자 국민으로 존재한다. 임금은 노동자들이 ‘사회적 인간’으로 존립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생존 수단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근대국가는 ‘노동자인 국민’들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고용·노동시간·임금·복지 등을 법률로 규제한다. ‘노동의 안정성(secur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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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해왔다. 자본이 노동자를 쉽게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마음대로 활용(노동시간이나 임금 등에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자본이 고용을 확대해 일자리도 늘어난다. 여기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동 관련 규제를 완화·폐기하고 부가 비용(기업 측의 사회보험료)도 축소해서 자본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안정성’을 희생시켜 ‘유연성’을 살리자는 거다. 이에 따르면 ‘유연성’과 ‘안정성’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병존할 수 없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유연성’과 ‘안정성’이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각국 학계는 물론 노동·경제 정책 입안자들이나 심지어 국제기구에서도 나오기 시작한다.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을 합성한 ‘유연안정성(flexcurity)’이란 단어도 유행한다. 이 유연안정성의 모델은 유럽 북쪽 국가들인 네덜란드와 덴마크다. 이 나라들에서 1980년대에 감행된 노동시장 개혁이 1990년대 들어 눈부신 성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동시장 개혁의 벤치마킹 모델로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언급했다. “우리나라도 네덜란드나 덴마크와 같은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보았습니다.”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이전과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름 견실한 성장을 지속해온 네덜란드가 전무후무한 경제위기에 맞닥뜨린 것은 1980년대 초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고용 노동자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복지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였는데 실업률이 30%에 가까웠으니 재정지출이 대폭 증가했다. 1982년 네덜란드의 재정적자는 GDP의 무려 7%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중도 우파 정부를 이끌던 루드 루버스 총리는 ‘경제 회복 및 산업 평화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노사 양측을 압박했다. 크리스 반 빈 당시 경영자연합회 회장은 바세나르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빔 콕 노총(FNV) 위원장을 불러 협상에 돌입한다. 두 사람은 1982년 11월24일 합의에 이른다.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이다.

협약에 따르면, 노동은 자본에게 ‘임금 인상 억제’라는 선물을 건넸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 대다수 나라에서 노총의 권한은 매우 강하다. 노총이 경영자 단체와의 협의에서 임금인상률을 결정하면 소속된 단위 노조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 자본은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일자리를 늘리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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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상에서 주도적 구실을 수행한 빔 콕 노총 위원장은 단위 노조들로부터 ‘자본에 빌붙은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네덜란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바세나르 협약 이전 10여 년 동안 이 나라의 임금인상률은 매년 5~15%였다. 그러나 협약 이후에는 5%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만큼 물가상승률 역시 낮아졌고, 네덜란드 경제는 급격히 정상 궤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총고용 수는 1982년 이후 2006년까지 250만명 늘어났다. 경제성장률도 1982년의 마이너스 1%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7%까지 상승한다. 네덜란드의 노동시장 개혁은 1990년대 말까지 계속되는데, 빔 콕 위원장은 이 과정을 재무장관·부총리·총리(1994~2002)로서 주도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네덜란드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의외로 높지 않다. 네덜란드 틸부르흐 대학 빔 반 오르스호트 교수의 논문(〈Flexible work and flexicurity policies in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2000년대 초 현재 유연한 노동계약(임시직·파견직·재택근무)의 비중은 유럽연합(EU) 평균 수준이다. 더욱이 ‘유연한 노동’의 전형적 사례인 야간 및 주말 노동, 배치 전환 등은 EU 다른 국가보다 오히려 적다. 정규직 해고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네덜란드는 ‘유연안정성’을 어떻게 성취했나?

파트타임 노동을 엄청나게 늘렸다. EU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2013년 현재 네덜란드 총고용의 50.8%가 파트타임 노동자다. 이웃 나라들의 2~3배 수준이다. 그런데 파트타임 비중이 높은데 ‘노동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파트타임 노동자를 전일제 정규직과 동등하게 처우하도록 법률로 규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에서는 임금, 노동계약, 노동조건, 세금, 보너스, 사회보장 자격 등에서 파트타임과 전일제 간의 차이가 없어졌다. 빔 반 오르스호트 교수의 분류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파트타임은 임시직이 아니라 ‘파트타임 정규직’이다. 한마디로 파트타임 노동의 지위를 정규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안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성취한 것이 네덜란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는 좀 다르다. 실제로 고용보호 수준이 낮고 따라서 이직률은 높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한 사회보장 급여가 제공된다. 또한 덴마크 정부는, 실업 노동자들이 다른 직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높은 수준의 직업교육과 훈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부문에 대한 덴마크의 재정투입 규모는 EU에서 최고 수준을 기록해왔다.

박근혜 정부와 경총, 전경련 등의 경영자 단체가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벤치마킹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유연성을 받아들이려면 그만큼의 안정성 역시 보장해야 한다. 파트타임 노동에 대한 처우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각종 사회보장 역시 대폭 강화할 용의가 없는 상황에서 ‘유연성만 강화하라’는 주장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복지(안정성) 없이는 유연성도 없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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