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정치 상황이 요동치던 1970년대 초반,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유럽 내 독일의 위상을 ‘경제적으로는 거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난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의 말은 상당 기간 유효했지만 이젠 빛바랜 표현이 되었다. 지금 독일은 28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는 9월22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민(CDU)·기사당(CSU) 연합 세력이 압승을 거둔 후 각 나라 언론이 보인 두려움과 선망에 가득 찬 반응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그리스 최대 일간지 〈타 네아〉의 보도. 황제관을 쓴 앙겔라 메르켈의 합성사진과 함께 ‘긴축 여왕의 승리, 유럽은 메르켈의 땅이 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는 메르켈의 승리로 그리스에는 혹독한 긴축 강요가 이어지리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스페인의 최대 일간지 〈엘 문도〉도 ‘메르켈, 메르켈, 세계에서 으뜸가는 메르켈’이라는, 나치 시대의 독일 국가(國歌)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세계에 으뜸가는 독일)’를 빗댄 제목을 달아 공포감을 드러냈다.
 

ⓒAP Photo2012년 10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나치 제복을 입고 행진하고 있다.

줄곧 메르켈의 유럽 정책을 비판해오던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총선 전 표지에서 ‘유럽의 모두를 지배할 여인’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메르켈을 지지하라”고 이례적으로 당부했다.

이처럼 독일의 부상을 경계하고 질시하면서도 선망과 경외의 눈길을 보내는 흐름은 유럽에 재정 위기가 확대되고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나라가 늘었던 2009년 이후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EU의 기관차’로 불리는 독일은 28개 EU 회원국 가운데 경제 규모가 가장 큰 국가다. 2011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2조5700억 유로(약 3730조원), 1인당 국민소득 6만1440유로(약 8900만원, 2012년 기준), 수출 1조600억 유로(무역흑자 1580억 유로)로 EU 내 2위와 4위 경제대국인 프랑스(GDP 1조9960억 유로, 수출 4290억 유로)와 이탈리아(GDP 1조580억 유로, 수출 3760억 유로)를 압도한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실업률이 27.6%와 26.3%로 6년째 구직난에 허덕이는 와중에, 독일은 실업률 6.7%로 EU 안에서 ‘번영의 오아시스’로 남아 있다.

“메르켈은 가장 위험한 총통”

이처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지닌 독일은 그리스와 스페인·이탈리아·포르투갈 등 재정위기가 심각한 나라들에 대해 긴축정책을 강요하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유로화 ‘보안관’ 노릇을 자임했다. 게다가 경제력이 곧 정치력이 되면서 한때 2차 세계대전의 원죄 탓에 주눅이 들어 있던 독일이 이제는 EU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정치 거인으로도 우뚝 섰다.

그러나 EU에서 차지하는 독일의 위상이 지금 상태로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독일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는 데다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연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키프로스 등 지중해 연안국 국민은 독일에 대해 증오감에 가까운 반응을 나타낸다.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에서 완장을 찬 히틀러에 비유되고 독일은 ‘점령군’으로 매도당한다. 2012년 6월 영국의 정치 주간지 〈뉴 스테이츠먼〉은 메르켈 총리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총통’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그리스에서는 긴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긴축 전도사’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을 메르켈 총리와 함께 나치 완장을 찬 ‘가장 증오하는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스페인 국민 82%, 포르투갈 국민 65%, 이탈리아 국민 58%가 메르켈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EU의 창설 목적인 번영과 민주주의, 인권이 초긴축정책 탓에 뒷전으로 밀리면서 “‘인간의 얼굴을 지닌 세계화’라는 이상을 독일 정부가 파괴하고 있다”라고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비난한다.

EU 의회에 이미 반EU 인기영합주의자들이 의석의 3분의 1을 점한 상황도 독일이 완강하게 긴축정책만 고집할 수 없는 쪽으로 몰아간다. 따라서 2014년부터는 독일의 긴축 일변도 정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기자명 뮌헨·남정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