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2005년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로 선출됐다. 그녀는 독일 역사상 최연소 총리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9월22일(현지 시각) 치러진 독일 총선거 이후 메르켈의 이력은 더욱 화려해질 전망이다.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 연합’(기민련)이 승리를 거두면서 메르켈의 3선 연임이 확실해졌다. 이로써 메르켈은 콘라트 아데나워, 헬무트 콜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선에 성공한 독일 총리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메르켈은 2017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여성 총리가 된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1년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AP Photo9월22일 지지자들을 향해 제스처를 취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은 41.5%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 630석 중 311석을 얻었다. 과반 316석에서 5석이 부족하긴 하지만 압승이라 표현해도 무리 없을 성과다. 독일 통일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당이 확보한 득표율 중 최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단독 과반을 달성한 총리는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가 유일하다.

독일의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은 25.7%, 좌파당과 녹색당은 각각 8.6%, 8.4%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다. 특히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약진했던 녹색당은 인기 하락으로 68석 중 5석을 잃게 됐다. 친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독일의 유로존 탈퇴를 주장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성적표는 더욱 초라했다. 두 정당의 득표율은 각각 4.8%, 4.7%에 그쳐 의석 배정 기준인 득표율 5%를 넘지 못했다.

독일은 의회 내 선거를 통해 총리를 뽑는다. 메르켈의 3선 연임이 확정되려면 의회 내 선거에서 과반 득표를 해야 한다. 하지만 별다른 변수는 없으리라 보인다. 기민련의 의석수가 단독 과반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야당이 합심해 사민당의 총리 후보 페어 슈타인브뤼크에게 몰표를 던질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메르켈이 3선 연임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메르켈은 정치인 선호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해왔다. 통일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꼽힐 정도다. 가령 지난 1월11일 독일 공영방송 ARD와 일간지 〈디 벨트〉의 여론조사에서 “당장 총선을 할 경우 메르켈을 뽑겠다”라는 응답이 사민당 후보인 페어 슈타인브뤼크에 비해 25%포인트나 많았다.

당보다 메르켈의 인기 높아

하지만 올해 초까지만 해도 메르켈의 3선에 적신호가 켜진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의 인기가 메르켈 개인의 인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 정당정치의 특성상 총리 개인의 인기만으로는 3선 여부를 미리 가늠할 수가 없다. 지난 1월20일 치러진 니더작센 주 의회 선거 결과는 메르켈의 3선 연임에 적신호로 해석됐다. 독일 정치 전문가들이 니더작센 주 선거 결과가 2013년 메르켈의 3선 여부를 가늠해볼 풍향계라고 예고했는데, 이 선거 결과는 사민당과 녹색당으로 구성된 좌파 진영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점쳐졌던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은 무난히 승리를 거뒀다. 전 세계의 관심은 독일 국민들이 또다시 메르켈을 선택한 배경에 쏠렸다. 해외 언론들도 메르켈의 리더십을 집중 분석한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들은 메르켈이 유로존 위기 속에서도 독일을 유럽의 강자로 일으켜 세운 점을 높이 샀다.
 

ⓒEPA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속옷 회사 광고에 등장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메르켈은 독일에서는 ‘무티(Mutti·엄마)’라 불리지만 해외에서는 ‘게르만의 철의 여인’ ‘프라우 나인(Frau Nein·안 된다고만 하는 여자)’ 등 단호한 느낌의 별칭으로 불린다. 유럽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남유럽에 긴축재정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유럽이 불안한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안정적인 손’을 원한다는 사실을 메르켈처럼 잘 아는 정치인은 없다”라고 평가했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메르켈은 카리스마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는 지도자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메르켈은 ‘카리스마가 없는 여성 정치인’이라는 주변의 우려를 보기 좋게 극복하며 총리직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개혁(Demokratischer Aufbruch)’에 동참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독일 통일 이후 민주개혁이 기민당에 통합되면서 1990년 이래 메르켈은 기민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됐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이때부터 따라붙었다. 1991년 최연소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8년 여성 최초 기민당 사무총장, 2000년 최초 여성 기민당 당수를 맡았다.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총리는 그녀를 ‘마인 메트헨(Mein Madchen ·나의 소녀)’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

정치인 메르켈의 위기관리 능력이 세간의 주목을 끈 계기 또한 역설적이게도 헬무트 콜 당시 총리 때문이었다. 콜이 불법 정치자금을 모은 사실이 드러나자 메르켈은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콜이 기민당에 큰 피해를 주다’라는 글을 기고하며 콜의 사임을 요구했다. 당 일부에서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비난이 나왔지만 대신 메르켈은 대중의 크나큰 신뢰를 얻었다.

메르켈은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평가를 내리는 총리로도 정평이 났다. 포퓰리즘 공약도 내걸지 않는다. 야당의 어젠다도 자연스럽게 흡수해 실천하려 노력하니 독일의 야당들이 맥을 못 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번 총선을 석 달가량 앞두고 사민당과 녹색당이 부자 증세를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메르켈의 기민당은 부자 증세를 반대한다. 이에 메르켈은 부자 증세 반대 기조는 유지하되 임대료 인상 제한, 최저임금 보장(독일은 최저임금제도가 없다), 아동수당 인상 등 야당의 정책을 그대로 베껴 대응했다.

연임의 과제는 대연정 협상

2005년 총리 자리에 올랐을 당시 메르켈은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실시했던 복지 축소 정책과 고용유연성 확대 정책을 그대로 추진하기도 했다. 취임 후 첫 의회 연설에서 “슈뢰더가 용기 있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2011년 후쿠시마 사태 이후 2022년까지 독일의 핵발전소를 전부 폐쇄하기로 한 결정도 ‘메르켈다운’ 사례로 꼽힌다. 2008년 당시 메르켈은 “핵발전소 없이 온실가스 감축은 불가능하다”라며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금지하자’는 사민당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나자 메르켈은 “핵에너지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힌다. 사태 발생 사흘 만인 2011년 3월15일, 메르켈은 1980년 이전에 건설된 핵발전소 7기를 일시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평소의 메르켈답지 않은 즉흥적 발표에 독일 국민 10명 중 7명은 ‘메르켈이 지방선거 때문에 꼼수를 부린다’고 비판했다.

같은 달 말, 메르켈 정부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9주간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이 윤리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를 토대로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핵발전소 17기 모두를 2022년까지 폐쇄한다”라고 밝혔다.

남은 숙제는 대연정 협상이다. 기민련이 단독 과반의 벽을 넘지 못한 데다 기존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민련은 사민당이나 녹색당과 대연정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증세 문제를 두고 여야의 차이가 아직 극명하다. 메르켈은 총선 직후 “이미 사민당과 접촉했다. 우리에겐 안정적인 정부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하면서도 세금 인상은 여전히 반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는 “대연정과 관련해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며 연정 참여에 유보적 의견을 밝혔다.

기자명 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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