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점인 북정노인정에서 우르르 내리고, 나도 인파를 따른다. 성북동 서울성곽 아래 구릉지를 따라 얼기설기 펼쳐진 북정마을. 마을버스는 도시와 마을을 잇는 유일한 대중교통이다.
도심에서 겨우 10~20분 들어왔을 뿐인데, 복잡한 서울을 벗어난 느낌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 울음소리가 귓가를 맑게 하고(뻐꾹새 소리도 들린다), 누구 하나 홀로 높게 솟아 있거나 자기를 뽐내지 않으며 소박하게 어우러진 낮은 지붕 집, 굽이굽이 이어진 동네 골목길 곳곳에 내걸린 빨랫감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70~80년대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준다.
주막 주인 어머니들은 주민들이 모이면 항상 먹을거리를 내놓았다. 알고 보니 쌀 같은 식자재를 이웃들이 ‘아지트’인 이곳에 모아주고 있었다. 쌀을 대주는 김재동 어머님은 “배고픈 사람 밥 주고 이웃들에게 베푸니까 이 사람은 항시 쌀이 있어야 돼”라고 말했다.
“아파트에선 이렇게 못 살지”
‘성미산 마을’과 같이 공동체 활동에 일찌감치 눈뜬 사람들이 대안적인 삶을 꿈꾸며 모여든 사례(물론 매우 중요하다!)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정신없는 도시 삶 속에서 망각해버린 기억이 있다. 김장처럼 혼자 하기 힘든 일은 공동으로 협력해 수고를 덜고, 배고픈 이웃이 있으면 서로 나눠 먹는 마을 풍경은 우리 민중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재개발이 안 된 북정마을은 고층 아파트는 못 얻었을지 모르지만, 이웃 간의 정과 더불어 사는 삶은 잃지 않았다.
후회나 미련이 있진 않을까? 주민 최금남 어머님은 “예전에는 아파트 얻어 들어간다고 하면 부럽기도 했는데 이젠 아파트 안 좋아 봬. (경치 좋고, 어울려 사는) 우리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지”라고 말했다. 정순애 어머님도 “아파트에선 이렇게 살지도 못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데”라며 거들었다. 마을 통장 김경동 아버님은 “1970~80년대 못살던 시절 모습들이 낡고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게 소중한 한국의 문화라고 생각해요. 이대로만 잘 놔두고 가꾸면 여기가 명승지가 될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다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는 길. 차창 밖으로 성곽 문화재와 자연, 저층 주거지가 어우러진 마을의 은은한 정취와 주민들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마차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며 환상에 빠지듯, 나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두 개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듯한 몽환적인 감정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