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김태윤 감독(40)에게 근황을 물었다. 김 감독은 〈잔혹한 출근〉(2006) 이후, 차기작으로 ‘삼성 백혈병’에 관한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 모두 그를 염려하는 와중에 아버지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래 잘한다. 싸움은 원래 제일 센 놈이랑 해야 티가 난다.” ‘센 놈’은 삼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 감독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 입사한 지 1년8개월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은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모델로 영화를 제작 중이다. 〈또 하나의 가족〉은 ‘아버지의 이야기’다.

김 감독은 지난해 여름 〈시사IN〉에 실린 삼성 백혈병 공판기를 보고 눈물을 훔쳤다(제198호 ‘삼성 백혈병 산재 판정까지의 대장정’ 기사 참조).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산재 판정을 받기까지 진행된 과정이 하나의 시놉시스였다. 딸의 죽음을 통해 처음 백혈병 문제를 세상에 알린 황씨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노무사를 통해 그를 수소문했다.
 


중국집에 가서 소주를 한잔하며 황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황씨는 긴가민가해했다. 그 뒤로 김 감독은 일주일에 한 번씩 1인 시위 등으로 황씨가 서울에 올 때마다 그를 찾아갔다. 그때만 해도 정확히 반도체가 뭔지 몰랐다. 행정소송이란 게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삼성 백혈병’ 공부부터 시작했다. 〈시사IN〉 기자와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 관계자를 만났다. 6개월간의 자료조사 뒤 지난 5월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다. 실화인데도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택시 안에서 딸이 죽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뭔가에 졸아 있는 게 화가 났다”

충무로에 발을 들인 지 10년째, 첫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좀 더 상업적이고 대중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그러다가 이게 뭐지? 이러려고 영화를 시작한 건 아닌데, 이럴 거면 영화를 안 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윤 감독은 좋아하는 이야기, 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또 하나의 가족〉은 지금껏 쓴 시나리오 10편 중 반응이 가장 좋았다(그는 〈인사동 스캔들〉의 원안, 〈용의자X〉의 각본을 썼다).

걱정은 주변의 몫이었다. 동료 감독들은 ‘그러다 다시 못 돌아온다’ ‘끝난다’ 이러면서 말렸고, 스태프들은 투자와 배급을 어떻게 할 거냐며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했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뭔가에 졸아 있는 게 화가 났다. 실제 사건을 영화화하는 건데 못 만들 이유가 뭔가. 그런데도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게 있었다.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쓰고 보니 스태프·배우 모두 반응이 좋았다. 누가 먼저 나서 불을 질러주느냐가 문제였다.

주연 배우는 박철민이다. 실제 황상기씨와 닮았다며 PD가 추천했다. 웃는 얼굴의 박철민처럼 황씨도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밝았다. 밝아야 견딜 수 있는가보다 싶었다. 박철민의 21세 딸은 시나리오를 보더니 아빠에게 직접 권했다고 한다. 황상기씨도, 그의 아들도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했다.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어떤 배우는 CF를 이유로 캐스팅에 난색을 표했다.

염려대로 투자는 난항이다. 〈또 하나의 가족〉은 영화 〈26년〉처럼 크라우딩 펀딩을 진행 중이다. 굿펀딩(goodfunding.net)에서 5000원부터 20만원까지 모금이 가능하다. 11월15일 현재 1137명이 참여해 5974만원(59%)이 모였다. 목표 금액은 1억원. 순수 제작비로 5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시작 초반에는 하루 1000만원씩 펀딩이 들어오더니 점차 미지근하다. 다음 대통령이 취임 전에 영화를 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는 김 감독. 그 바람이 이루어질지가 투자에 달렸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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