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효리가 작곡료 대신 채소를 건넸다. 자선 콘서트에 쓸 곡을 재능 기부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리. 옥상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와 토마토를 작곡가에게 선물했다. 이효리는 온스타일의 〈골든 트웰브〉에서 소박한 텃밭의 일상마저 트렌디하게 보여준다.

또 다른 20~30대 젊은 남녀가 여기 있다. 이효리 못지않게 잘 논다는 공통점 말고도 도시 농부라는 게 닮았다. 특히 오줌 냄새에 익숙하다. 농사. 누구에게는 고급 취미이고 누구에게는 삶의 철학, 다수에게는 재미다. 젊은 도시 농부들의 다양한 일상을 소개한다.

● 도시 농부 모임 ‘파절이’

떨리는 순간. 스무 개의 눈동자가 한곳을 향했다. “뽑는다~. 하나, 둘, 셋!” 스티로폼 화분 위로 모습을 드러낸 건 주황색 당근. 7㎝ 남짓 길이는 그렇다 쳐도 굵기가 형편없었다. 전을 해먹자는 얘기가 쑥 들어갔다. 솎아낸 당근 밑동이 기자 몫으로 돌아왔다. 이 귀한 걸 혼자 먹어도 될까 하는 순간 손은 이미 입에 닿았다. 아, 달다.


ⓒ시사IN 이명익‘파절이’ 회원들이 환경운동연합 옥상에서 채소를 돌보고 있다. 홍대 앞에서 채소를 팔기도 한다.

6월10일. 멀리 청와대가 보이는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옥상에 청년 10명이 모였다. 자칭 ‘파절이’. ‘파릇한 젊은이’의 줄임말이다. 환경운동연합 앞 텃밭과 옥상, 노들섬에서 작물을 키우는 도시 농부 팀이다. 대학생과 프리랜서, 직장인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지난해 12월 결성됐다. 직접 먹기도 하지만, 홍대 앞 유기농 음식점 3군데에 납품도 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도시 농업뿐만 아니라 로컬푸드의 모델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원재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소통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누하동에서 홍대 앞까지 채소는 자전거로 배달한다. 30분 거리가 1~2시간씩 걸렸다. 그렇게 해서 지금껏 판매한 금액은 약 5만원.

텃밭에는 감자와 애플민트 등 허브를 심었다. 옥상에는 근처 시장에서 얻은 스티로폼 상자에 오크상추, 적상추, 당근, 적겨자, 참외, 셀러리, 열무, 토종갓, 청겨자, 치커리 등을 심었다. 볕이 잘 들지 않아 3월에 심은 감자 농사는 망쳤지만 나머지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10명이 각각 작물, 퇴비, 기획, 디자인 등 분야별 담당을 가지고 있다. 재배는 같이하되 특기가 다르다. 이날은 특히 퇴비팀의 시름이 깊었다. 퇴비 만드는 통에서 흙냄새가 나야 하는데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났다. 잡다한 음식물 쓰레기가 섞인 게 문제였다. 염분이 있는 음식 쓰레기는 퇴비가 될 수 없다.


ⓒ서울시 제공서울 한내들어린이집의 옥상농원. 어린이들에게 농업 체험 학습도 시킨다.

오후에는 베테랑 막내 이혜나씨(23)의 교육이 이어졌다. “지난번에 고랑하고 두둑의 차이가 뭐라고 했죠?” 막내지만 경험은 가장 많다.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도 텃밭 가꾸는 걸 가르친다. 작물 심는 순서에 대한 복습도 이어졌다. 옥수수, 오이처럼 큰 건 뒤쪽, 해지는 위치도 고려해야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한 노하우다.

멤버의 주축인 나혜란씨(25)는 환경운동연합 막내 간사다. 활동가로서 좋은 사례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밭을 얻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별명은 ‘썬데이총장’. 주말 동안 마당에, 옥상에 일을 벌여놔 선배들이 노심초사한다. 먹을거리와 관련해 ‘더 창조적’인 걸 해보고 싶다는 파절이. 앞으로 2기, 3기까지 이어지는 게 목표다.


● 찾아가는 농부 수업 ‘레알텃밭학교’

7㎝는 족히 되어 보이는 굽과 짧은 반바지. 오전 나절 성북구 텃밭에서 일을 하다 왔다는 황윤지씨(25)의 차림이 인상적이었다. 그에겐 따로 작업복이 필요없다. 벌써 3년째 도시 농업을 하고 있는 황씨에겐 텃밭이 일상. 오늘도 그 밭에서 수박, 참외, 땅콩, 토마토를 매만지다 왔다.

2010년 고려대에서 시작한 레알텃밭학교가 이화여대, 연세대, 서울대까지 이어졌다. 고려대는 텃밭을 가꾸는 모임이 중앙 동아리로 자리를 잡았다. 한 학교에서 한 학기씩 텃밭 강좌를 한다. 운영진은 10명. 주 1회.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직접 도와주는 방식이다. 수강생은 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다양하다.


ⓒ씨앗을뿌리는사람들 제공대학생 모임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날 이들은 생태 화장실을 선보였다(위).

터를 얻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뺏고 뺏기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캠퍼스의 빈 땅을 노려 몰래 경작을 하다가 실패한 적이 많았다. 빈 공간은 모두 건축계획이 있었다. 4년 후에나 공사가 시작되는데도 땅을 쓰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학기에는 서울대 기숙사 근처에 땅을 얻어 140평(약 463㎡)을 경작했다. 평소에는 50명 넘는 사람들이 10~15평에서 농작을 배웠는데, 이번에는 제법 할 만했다.

대학을 고집하는 이유. 대학생들의 생활 공간이 대학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아닌데 그만두면 할 사람이 없다.” 황씨와 친구들이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텃밭을 하면서 삶이 변했다는 수강생이 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다. 밭에서 체육대회를 한다. 일을 한 뒤 갓 딴 작물로 비빔밥을 해 먹는다. 텃밭에서 쌓은 인연이 두터워졌다.

6월8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선 레알텃밭의 유기농 비료가 전시됐다. 바로 오줌이다. 페트병에 오줌을 담아 한참 두면 색이 까맣게 된다. 그걸 물에 희석해 밭에 뿌리면 된다. 오줌 든 페트병에 거리낌이 없는 황씨. ‘레알’ 도시 농부였다.

● 1인 가족 에코 네트워크 ‘이웃랄랄라’

밭두렁 사이로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다. 버스커버스커의 음악이 봄바람을 가르다가, 소소한 수다가 이어졌다. 6월2일, 노들섬의 ‘1인 가족 에코 네트워크 이웃랄랄라’의 밭두렁 콘서트 장면이다. 소박한 무대에 선 회원 한 명이 ‘뷔페에 가서 많이 먹는 법’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는 회원이다.


ⓒ시사IN 조남진1인 가족을 위한 텃밭 모임 ‘이웃랄랄라’를 만든 이정인씨.
이정인씨(33)가 이웃랄랄라를 생각한 건 2년 전. 독립을 하면서 1인 가족을 위한 텃밭 모임을 꾸려보기로 했다. 자취하는 친구들 대부분 챙겨 먹는 데 소홀했다. 이웃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자취 생활에 찌들고 병든 육체를 신선한 채소와 과일로 정화시키고 나날이 좁아져가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도모하려는’ 이웃랄랄라가 탄생한 이유다.

2010년 3월 모임을 시작한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기르기 쉬운 상추·고추·토마토를 키웠다. 합정동 카페 옥상,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을 이용하다가 이번에 처음 노들섬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은 흙을 퍼다 나르는 게 일이었다. 땅에 직접 재배하니 화분과 달리 쑥쑥 자랐다. 10~20명 회원은 대개 회사원이다.

회원 대부분 환경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지는 않다. 종이컵을 쓰지 않거나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정도의 생각. 농사에 목숨 걸기보다는, 텃밭을 계기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자리에 가깝다. 이씨 본인도 마음이 맞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을 얻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올해는 ‘서울문화재단 시민예술활동지원’에 선정돼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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