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이 “거리 농성 1500일 지나도 참 고와요”라고 치켜세우자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44)은 “그럼요, 그 전에는 얼마나 더 고왔겠어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바빠서 온종일 굶었다는 그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거리 농성을 이끈 힘이 아닐까. 지난 1월28일 재능교육 농성은 1500일을 맞았다.

보름여 뒤인 2월15일은 쌍용자동차 노조 투쟁 1000일째 되는 날이다. 원래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51)은 대담을 거절했다. 1월30일~2월11일 서울·경기 지역의 장기 투쟁장을 순례하는 ‘희망뚜벅이’에 참가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도, 동료들이 이끌자 마지못해 승낙했다. “합시다.” 그의 짧고 굵은 대답을 듣고서야 대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사IN 조우혜장기 투쟁 농성장을 순례하는 ‘희망뚜벅이’들. 복직 투쟁을 벌이는 전국 사업장의 노동자들도 상경해 참여했다.

하종강(하):희망뚜벅이부터 시작해보자. 한겨울에 걷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유명자(유):재능교육과 쌍용자동차 투쟁을 기념하기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투쟁의 상징처럼 조명받았지만, 외롭게 투쟁 중인 장기 사업장이나 1인 사업장도 많았다. 이들을 만나러 떠난 날이 하필이면 1년 중 제일 추운 날이었다고 하더라.

하:어디를 다녀왔나?

김정우(김):1월30일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에서 시작해 세종호텔·현대자동차, 경기 과천 코오롱 본사·안양 기아자동차·시흥 파카한일유압, 인천 대우자동차판매·콜트콜텍 등에 다녀왔다. 2월11일 마지막 일정은 평택 쌍용자동차이다. 복직 투쟁을 벌이는 전국 사업장 노동자들도 상경해 지원하고 있다. 경북 구미의 코오롱과 KEC, 경기 동탄의 한국3M 해고자들도 함께 걷는다.

하:코오롱도 오래 싸웠다.

유:8년째다. 1∼2년 투쟁해서는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게 돼버렸다.

하:희망뚜벅이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 하나만 소개해달라.

김:2월7일 오전 6시 경기 안산시에 있는 동서공업에 지지 방문을 갔다. 해고자들이 퇴근하는 야근자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는데,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더라.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이 해고자가 되어 나타난 셈이다. 저마다 나 대신 잘렸다는 미안함과 자신도 그리될지 모른다는 불안함, 가까이 하면 손해 본다는 판단이 얽혀 있을 것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유:1월30일 희망뚜벅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300명 가깝게 참가했다. 출발하려던 순간 경찰과 마찰이 있었다. 경찰은 몸에 두른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뚜벅이’ 조끼를 풀고 깃발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결국 5시간10분가량 대치했다.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시내를 돌고 돌아 세종호텔 앞에서 모였다. 약식집회를 하는데 출발할 때 앞자리에서 사진만 찍히고 간 사람들이 또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진 찍히는 데만 앞장서지 말고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켰다면 이렇게 오랜 세월 농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개인적으로 궁금하다. ‘거리의 투사’로 불리는 두 사람은 어떻게 싸움을 시작했나?

유: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굉장히 특별해서 이런 싸움을 한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고민해봤다. ‘나에게 반골의 피가 있나?’(웃음) 재능교육의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았다. 회사의 불합리한 면을 천천히 바꿔나가야겠다고 여긴 것뿐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조합을 꾸려야겠더라. 노동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가 여기까지 왔다.

하:식구들의 반응은 어땠나?


ⓒ시사IN 조우혜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하종강 교수(왼쪽부터).

김:(머뭇거리며) 아내는 나와 10년 동안 싸우면서 포기한 것 같다. 지금은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올해 스무 살인 김 지부장의 딸은 트위터를 통해 김씨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아빠가 자랑스러워! 보일러 켜놓고 엄마랑 기다릴게’).

유:얼마 전, 김 지부장의 아내가 실내 포장마차를 개업했다. 얼른 홍보하라!

김:서울 상도역 1번 출구 70m 지점…(웃음).

하:장기 투쟁을 하다보면, 힘들 때가 많을 것 같다.

유:동료가 숨을 거둔 뒤 힘든 시기를 많이 겪었다(2009년 유방암 판정을 받은 이지현 재능교육 조합원이 1년6개월 투병 생활을 하다 지난 1월13일 세상을 떠났다). 워낙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친구라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지난해 가을에는 강원도 춘천에 있는 생기마을에 함께 가자고 하더라. 마침 그때 100일 단위 집중투쟁을 계획하던 터라 다음에 가자고 미뤘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자기가 가고픈 게 아니라 나를 데려가고 싶었던 거라고 한다. 너무 지쳐 보여 한방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고… 나더러 몸 챙기라는 말을 많이 했다.

김:‘복직할 수 있다’는 꿈을 안았던 희망퇴직자와 무급휴직자는 아무도 복직되지 않았다. 그 사이, 사람들은 스무 명이나 죽었다. 공장 앞에서 노제 지낼 때마다 속으로 ‘한 명이라도 복직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해고자들이 회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회사 측은 파업에 참여한 이들이 복귀하면, 공장 내 질서를 흐트러뜨릴 거라고 말한다. 정부 또한 쌍용차 사태를 두고 ‘노사 선진화의 모범으로 삼겠다’ ‘노동 유연화 시범 케이스로 삼겠다’고 말한다. 강성 노조를 제거하려는 시나리오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하:쌍용차 사태를 보면서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대처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와락 상담심리치료센터에서 김정우 지부장도 치료를 받았나?

김:와락 센터 창립 후 여섯 명이 함께 상담을 받았다. 2009년 8월9일 ‘노사 대타협’ 후 공장에서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아파트 5층에 살았는데 마음이 울적해지면 술을 먹고, 그러다보면 뛰어내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내와 살짝 마찰만 생겨도 ‘남편이 해고됐다고 얕잡아보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상담받는 8주 동안 참 많이 울었다. 지부장인 나와 사무국장·비정규직·무급자·희망퇴직자가 같이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8주 동안 또 울고 또 위로하고… 기분이 묘했다.

하:자살한 사람 중에 희망퇴직자가 많았다.

김:말 그대로 ‘희망’해서 나갔으니 해고자에게 연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연락은 두절되고 모아둔 돈마저 까먹고 나면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한 해고자가 거제도로 가서 이력서를 냈지만 쌍용차 이력을 갖고 있어서 취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비참함을 실감하는 것이다. 

하:산업재해를 당한 모든 노동자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산재사고로 손가락 두 개를 잃으면, 인생에 대한 실패감·열등감·좌절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유명자 지부장은 심리치료를 받아본 적 있나?

유:없다. 요새 ‘세다’는 소리를 듣는데(웃음), 싸움이 길어지다보니 점점 울화병이 생긴다. 이른바 자본가가 나의 적이었는데, 그 분노가 점점 나를 향하는 것 같다. 특히, 2010년 3월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부터 뭔가 모를 두려움이 시작됐다. 내가 농성장에 없어도 다른 동료가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용역이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워 누워서도 머리가 쭈뼛쭈뼛 선다. 바늘이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다.

김: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호흡하면서 느끼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우리를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

하: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재능교육은 특수고용 노동자 투쟁의 상징처럼 보인다.

유:우리는 큰 틀에서 비정규직이지만, 소사장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있다. 부당해고와 부당노동에 대해 싸울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노동계는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도 풀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곧, 정권이 바뀐다고 우리의 처우가 개선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재능 사태는 노사 간 임금 문제가 아니라 특수고용 문제 전반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재능교육과 쌍용자동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까?

김:쌍용차를 보면, 노동운동 탄압의 종합선물세트이다. 경영자는 무책임하게 그대로 있고, 일손이 달려도 기존 해고자들은 복직시키지 않는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유:이 투쟁의 열쇠는 회사가 가지고 있다. 특수고용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또 희망버스에서 발견한 연대의 힘도 있다.

하: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꿈은 무엇인가?

유: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교사였다. 사진 공부를 하기 위해 장비가 욕심나서 취직했는데 그때부터 발목이 잡혔다. 투쟁이 끝나면 자유롭게 풍경과 사람을 찍고 싶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하는 철학과 역사 교육 활동을 하고 싶다.

김:꿈…, 솔직히 사는 게 힘들다. 해고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해고되면서 나의 관계를 모두 정리해야 했다. 일상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

하:못다 한 이야기를 해달라.

유:투쟁 1500일이 돼서야 인터뷰 요청이 봇물 터지듯 한다. 그럼에도 기사는 농성장 철거, 용역 깡패, 재산 압류 따위의 감성을 훑는 게 주를 이뤘다. 나는 우리의 요구가 떼쓰는 강성 조합원이 하는 말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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