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국내 유명 제약회사에 입사한 지 겨우 1년 만에 젊은이는 싱크대와 화장실에까지 비싼 약들을 꽉꽉 채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거래처에 약을 무리하게 밀어넣었다가 반품받은 물건을 처리하지 못해서다. 세상의 온갖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그는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그를 자살로 몰아간 회사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하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곳에선 거의 매년 전 직원 ‘캠페인’이란 걸 했다. 말이 좋아 캠페인이지 직급에 따라 확장 의무 정기구독자 수를 할당하고 실적을 공개하는 잡지 판매 강요였다. 입사할 때 이미 친인척과 친구를 팔아먹은 처지라 기댈 데라곤 취재원밖에 없었다. 취재원에게 손 벌리기 싫은 친구들은 월급을 털어 체면치레를 하곤 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강제하는 회사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년간을 한 부도 하지 않고 버텼다. 편집국장이나 데스크가 불러 으르거나 달랬지만 못 들은 척했다.


ⓒ한성원 그림

평기자가 견디기에는 힘든 시련이 닥쳐왔다. 특종도 하고 상도 여러 번 탔지만 그런 건 소용없었다. 편집국장이나 데스크가 대하는 태도가 싸늘해졌고 승진에서도 두 번이나 누락됐다. 그런 걸 다 감수하는데도 사주가 회의 때마다 ‘당장 목을 치라’고 아우성을 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회사가 매년 흑자 기록을 갈아치우며 순항 중이었는데도 그 지경이었다. 그 때 비정상이다 싶게 민감하게 구는 상층부의 반응을 살피면서 깨달았다. 자본가는 거의 본능이다 싶게 노동자가 자존심을 지키려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가 쓴 책들을 보면 그가 1977년에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시간여행자가 아니었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30~40년 후에 벌어질 일들을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하게 예견했다. 주류 경제학이 대형화·거대화·세계화의 미덕을 찬양할 때 그는 홀로 깨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라고 일갈한 인물이다. 지난해 10월 번역돼 나온 〈굿워크〉(느린걸음 펴냄)는 직업의 세계에 처음 뛰어드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영혼 없는 노동의 결과

그는 이 책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라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로 시작한다. 산업화·기계화·자동화 따위의 어휘가 대표하는 근대는 노동의 숭고함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노동이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사람들은 신을 비롯한 전통 가치관을 대신해 산업화와 기계화를 신봉하면서 노동이란 점차 제거해야 할 짜증나고 성가신 것으로 여기게 됐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산업화는 노동시간을 조금도 줄여주지 못했다. 그것이 본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업화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탐욕을 지녔다. 현대 산업 시스템에는 성장을 갈망하는 붙박이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계속 맹렬히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 산업 시스템의 사전에서 안정이라는 단어는 쫓겨나고 정체라는 말이 대신 들어앉았다. 그저 성장을 위한 성장을 계속할 뿐 마지막 모습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어디까지 가야 ‘포화지점’인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굿워크〉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지음느린걸음 펴냄
그런 상태라면 노동자는 도전할 가치도 없고, 자기완성을 위한 자극도 없으며 진선미의 요소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노동에 평생을 허비하라는 종신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슈마허는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효율을 중시하는 산업체제는 규모가 커질수록 권위적으로 변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생산 요소’의 하나로만 간주됐다. 생산 규모에서의 대량화·거대화는 대자본에게만 유리해 양극화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고, 양극화 속에서 노동이 인간과 유리되는 속도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빨라졌다. 노동에서 품위를 찾으려는 자는 조직의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재벌은 노동조합을 병적으로 싫어하게 됐다.

영혼 없는 노동의 결과가 무엇인지 자살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은 몸으로 증명했다. 죽은 노동자의 사회는 도처에서 목격된다. 많은 악덕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CCTV의 감시 아래 동료와 얘기도 주고받지 못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일한다. 국민개병제 아래서 징집돼 시위 진압에 동원된 전경들도 영혼을 빼앗긴 노동자이다. 재벌의 비자금 은닉·탈세·편법 상속을 덮느라 고급 양복을 빼입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거짓말을 늘어놓는 대기업 홍보 책임자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정신을 유체 이탈시키고 음성 노동만 하는 셈이다. 진정성을 담지 않은 노동이어서인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 나도 사과하는 법이 없다. 탓하는 사람도 없고.

언론계에도 영혼 없는 노동이 늘어만 간다. 방송사에서 낙하산 사장이 분탕질을 하는 통에 유능한 기자들이 일과 유리됐다. 종편이 생기면서 큰 신문사의 사정이 악화돼가는 게 눈에 보인다. 품위를 지키려고 들면 그곳 기자들의 설 자리는 계속 좁아질 것이다. 집회 때마다 어버이연합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한마디라도 더 받아 적느라 애쓰는 큰 신문사 젊은 기자들의 모습에서 일과 영혼의 분리를 읽는다.

슈마허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에게 잠재력을 사용하고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일을 함으로써 태생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일이어야 한다.

슈마허는 말뿐만 아니라 실천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19세기에는 기술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량생산이란 체제를 택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재미와 창의력을 말살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조직과 중간기술을 우리의 미래로 선택하자고 호소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에너지와 먹을거리를 자급하는, 삶의 질이 높은 작은 공동체가 속속 생겨나는 것은 그의 영향이다. 적지 않은 나라가 대형 발전소 위주의 국가 전력망을 풍력이나 태양력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소규모 전력망이 포함된 망으로 바꿔나가려는 것이나 아프리카에서 도기로 만든 냉장고와 태양열 레인지가 수많은 이들을 기아에서 구해내는 것도 그의 발상에 힘입은 것이다. 


대기업과 대형 언론의 운명

그는 조직은 가장 높은 곳에 큰 별이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언제든 날아가려는 놀이용 풍선을 여러 개 쥐고 있는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니라 역동성 있는 작은 조직이 연합한 형태가 좋다는 것이다. 현재 괄목할 실적을 올리는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그의 의견을 반영한 모양새이다.

눈에 불을 켜고 모두가 성장을 부르짖던 시대에, 그리고 성장이 인간이 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보였던 시대에 슈마허는 서구 산업 사회의 파국을 예언했다. 그는 석유처럼 다시 쓸 수 없거나 원자력처럼 통제가 불가능한 자원을 기반으로 한 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고 증명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특히 기술을 신처럼 받들었던 일본이 원전 사고의 늪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가는 걸 보면 그의 예지력을 새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슈마허에 따르면 대량생산 위주인 대기업의 수명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 산업체제를 지탱해온 대형 언론 역시 남루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미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작은 언론의 희화화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슈마허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젊은이에게 무의미하고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노동을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옳다. 이제는 기자 지망생에게 말할 수 있다. 거기는 길이 아니니 가지를 마시게.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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