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스 포먼의 영화 〈래리 플린트〉(원제: 대중 vs 래리 플린트)는 미국 성인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법정 분쟁을 벌이는 과정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래리 플린트는 모든 사람과 싸운다. 카메라 앞에서 혐오스러운 말을 쏟아낸다. 판사에게 아무거나 집어던진다.

그런 도색잡지 발행인을 좋아할 사람은 드물다. 결국 테러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된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외친다. “당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내가 왜 감옥에 가야 하지?” “나 같은 쓰레기 3등 시민의 자유가 보호받을 수 있다면, 여러분 같은 1등, 2등 시민의 자유 또한 당연히 지켜질 겁니다.”

결국 영화는 래리 플린트가 승소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당시 미국 대법원은 이렇게 판결했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며 진리 탐구를 위한 초석이자 건강한 사회의 밑거름이다.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전부 들어보기 위해 수정헌법 1조가 존재한다.”

최근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후, 서울대 4학년 박선아씨가 학생회관에 분향소를 설치했다가 저지당하면서 촬영된 사진이었다. 여러 명의 몸이 뒤엉킨 가운데 김정일이 사진을 뚫고 튀어나올까봐 겁을 먹은 듯한 청원경찰이 그 불온한 얼굴을 황급히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활빈당’이라는 보수 단체는 박선아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나는 종북 문제에 대해 매우 명확한 반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안의 역사적 맥락과 결을 따져볼 때 김정일 분향소라는 아이디어는 이승만·박정희 동상처럼 상당히 매니악(미치광이)한 근성의 변태성욕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시각과는 무관하게 이 한 장의 사진이 증명하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준은 참담한 것이다. 이것이 왜 “김정일은 추모할 수 있는 사람이냐, 추모할 수 없는 사람이냐”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단 말인가. 또한 왜 진보적 판단을 한다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종북 좌파들 때문에 민주 진영 전체가 욕을 먹는다” 혹은 “나는 좌파가 아니다” 식의 우파 프레임 안에서 맴도는 자기 검열이 호출되어야 한단 말인가.

‘과도한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어불성설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명백한 근간이다. 빤한 이야기이면 뭐 하나, 그게 현실에서 작동을 안 하는데. ‘자유’국가의 수준은 그 사회에서 가장 역겹고 불편하며 추잡스러운 액션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부터 결정된다. “과도한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누구나 모든 사안에 대해 논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모든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학생처럼 김정일 분향소를 주장할 자유도 있고, 나처럼 그걸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판할 자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하게 불쾌하다는 이유로 억압하거나 차별하고 단죄할 수는 없다.

국가보안법의 존속 가치를 아무리 넓게 포용해주더라도 지금 시대에 김정일 분향소 정도를 단속하기 시작하면 복마전이 된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헌법 제37조2항 역시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그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지난주 보훈처는 대통령이 참석한 연두 업무보고회에서 “2040 세대를 중심으로 햇볕정책과 남북 화해가 현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 및 한·미 동맹 강화보다 안보에 유리하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배변 활동의 결과물로 말을 빚었을 때나 가능할 법한 이런 생각조차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살기 좋은 나라에서 보호받지 못할 표현이란 아무것도 없다.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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