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오세훈이 산 한명숙을 제압할 수 있을까. 서로 ‘적진’ 한가운데 떨어진 민주당 대권 주자 손학규와 친박계 브레인 유승민은 전공을 세워 돌아올까, 도리어 포로가 될까.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결과가 그렇다. 〈시사IN〉과 (주)트리움은 오피니언 리더 100인의 응답을 모아 담론 지도를 그리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담론 지도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인물 네트워크 지도도 그려봤다. 즉, 진보와 보수 담론에서 누가 중심인물로 나타나는지를 따져보았다.

그 결과가 아래의 〈그림 1〉이다. 그림에서 푸른색은 보수, 붉은색은 진보 인사들의 네트워크다. 선이 이어진 인물끼리는 담론을 공유하는 정도가 크다고 볼 수 있으며, 인물을 나타내는 점의 크기는 그 인물의 말이 담론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를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즉, 점의 크기가 클수록 담론을 대표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분석에는 실제 현실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인지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로지 〈시사IN〉에 보내온 답변 내용이 담론의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분석한 다음, 그 답변을 한 인물의 이름을 적어넣은 것뿐이다(애초에 컴퓨터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그림 1〉은 현실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상관없이, 담론 지형에서 그 인물이 갖는 보편성·대표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진보와 보수는 먼저 좌우에 확고한 자기 ‘대륙’을 만들었다. 첫눈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네트워크 지도 왼쪽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그가 보수 최대 대륙의 핵심에 자리를 잡은 것이 그림으로 나타난다. 오 전 시장은 주민투표 이전에 시장직을 유지하고 있을 때 〈시사IN〉에 답을 보내왔다.


보수·진보 담론의 원형 보여준 오세훈·한명숙

그가 보내온 답변은 이렇다.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대한민국은 ‘지속 가능한 국가발전’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음. 성장 없는 퍼주기 복지의 환상에서 벗어나 균형 있는 성장과 복지로 미래를 준비해야.” 양극화·저출산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성장 없는 퍼주기 복지’를 비판하면서 가장 전형적인 보수 담론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를 보면 가장 많은 보수 인사가 오 전 시장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보수 네트워크의 최대 허브인 셈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박형준 대통령 사회특보 등 보수의 핵심 인사가 그의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오 전 시장이 비록 주민투표에서 패배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내놓은 담론은 보수층 대다수가 호응할 만한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민투표 정국을 시작하면서부터 ‘보수의 아이콘’을 노리는 행보를 보였고,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면서도 정치적 여지를 짙게 남겼던 오 전 시장에게는 고무적인 분석 결과가 나온 셈이다.

오른쪽 진보 대륙은 뚜렷한 허브 없이 친노 인사들과 민주당 내 진보파 등이 고루 포진했다. 오 전 시장이 내던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군으로 꾸준히 거론되는 한명숙 전 총리의 자리도 여기다. 한 전 총리가 됐든 누가 됐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할 야권 후보는, 오 전 시장이 공고하게 만들어놓은 담론과 보수 결집 구도를 헤쳐나가야 한다. 한 전 총리는 2012년 시대정신으로 ‘정권 교체’를 꼽으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경제·국방·교육·환경·민주주의·남북관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정권 교체는 파탄 직전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민주·진보 진영은 작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연대와 통합으로 뭉쳐, 시대의 소명에 부응해야 한다”라고 응답했다.

 

 

 

 

 

 

 

 


진보 네트워크 중에서도 친노 인사들은 담론상의 유사성이 특히 크게 나타났다. 한 전 총리, 정연주 전 KBS 사장, 문성근 백만민란 대표 등 친노 색채가 짙은 응답자가 한곳에 옹기종기 모였다. 친노 중 이해찬 전 총리는 정통 운동권 색깔이 강한 쪽에 위치했다(이해찬·이부영·이인영 등).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가 오른쪽 아래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묘하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친노가 각각 ‘보수·진보의 아이콘’ 자리를 노리며 ‘본진’을 관리하고 있다면, 두 대륙의 교집합 지점에서 ‘중원 장악’을 시도하는 이들도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보수 대륙 쪽으로 홀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진보 대륙 쪽에 가까이 접근한 한나라당 유승민 최고위원이다. 유 최고위원이 친박계의 핵심 브레인인 만큼, 사실상 손학규·박근혜 두 대선 주자의 행보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먼저 손 대표가 보내온 응답부터 보자. 손 대표는 시대정신으로 ‘진보·민생·정의’를 꼽으며 “민생이 어려워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복지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시작되었다. 진보적 성장을 하면서 특권과 반칙, 차별을 줄여나가 정의를 바로 세우고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정의와 보편적 복지, 그리고 진보적 성장은 민생 진보의 3대 축이다. 민생을 최우선 목표로 강자의 반칙과 특권을 철폐하고 원칙과 정의가 바로 서는 ‘사람 중심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시대적 요구이다”라고 응답했다.

여타 진보 인사들의 전형적 응답에 견주면, 기본적으로는 내용상 궤를 같이하면서도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계속 붙들고 가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손 대표는 네트워크 지도에서 보수 대륙 쪽으로 비교적 다가간 것으로 나타난다.

진보의 손학규에 대응하는 유승민 최고위원은 ‘복지’를 내세운 친박계의 좌 클릭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도 감세 철회 등 파격적인 공약을 쏟아냈다.

그가 꼽은 시대정신은 ‘공동체의 안정’이다. “양극화로 공동체가 분열되고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복지와 교육 분야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책임 있는 보수 세력이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는 개혁정책을 펼쳐야 한다.” 역시 기본적으로 보수 인사들의 담론을 공유하면서도, ‘양극화’ ‘복지’ ‘국가의 역할’을 중요한 키워드로 내놓는다. 담론의 중심에 있는 보수 인사 중 그가 가장 진보 대륙 깊숙이 들어간 이유다.

 

 

 

 

 

 

 


박근혜·손학규·오세훈·친노의 ‘정치 문법’

분석을 총괄한 트리움의 김도훈 대표는 두 사람에 특히 주목했다. “마치 바둑에서 적진 한가운데 침투한 모양새다. 잘 되면 영토를 확장할 수 있고 잘못 되면 혼자 고립된다.” 온건 중도 성향의 유권자에게 누가 더 강한 호소력을 지닐 것이냐는 문제에서, 서로의 담론 진영에 한 발을 걸친 두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왼쪽 그림을 보자. 붉은색이 진보, 푸른색이 보수 진영이다. 〈그림 2〉는 진보 진영이 온건 중도층의 담론을 장악한 것(즉, 진보가 ‘중원을 장악’한 것)을 상정한 그림이다. 보수가 갈라지고 진보가 전체 여론 지형의 대다수를 점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림 3〉은 그 반대다. 보수가 ‘중원을 장악’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다. 〈그림 2〉에서 노란색 점선으로 표시된 온건 중도층 여론의 향배가 결정적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표 복지’를 내세워 중도층 공략을 핵심 전략으로 삼는 박근혜와, 중도층이 거부하지 않는 진보 후보를 최대 강점으로 내세우는 손학규. 박근혜의 중도 행보에 대응해 보수의 아이콘 지위를 노리는 오세훈과, 손학규 카드에 의구심을 거두지 않으며 진보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친노. 일인당 몇 줄의 답변만을 재료로 한 네트워크 분석은, 컴퓨터가 알 리 없는 현실 정치의 문법까지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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