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있는 해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떠오르는 해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던 2002년이 ‘정치 개혁’과 ‘세대교체’를 상징했다면,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2007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단연코 ‘경제성장’이었다. 대다수 선거가 현재 집권 세력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지니지만, 대선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집권 세력 자체를 새로 세우는 선거인 만큼, 대선에서는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특히 대선이 있는 2012년은, 이른바 ‘1987년 체제’의 막을 내리는 거대한 전환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모두 나온다.

민생 문제의 해법을 경제성장에서 찾았던 2007년판 시대정신이 실망스러운 결과로 돌아온 지금, 2012년 대선은 어떤 시대정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이 질문은 누가 대통령이 될까라는 질문보다 먼저 나와야 한다. 무엇이 시대정신인지를 확인한 뒤에야 누가 적절한 대변자인지도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IN〉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 100명에게 ‘2012년 대한민국 시대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보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간략한 설명도 부탁했다.

설문 대상자는 정치·경제·학계·시민사회 네 분야로 나눴다. 진보에서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정연주 전 KBS 사장 등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가 답을 보내왔다. 보수에서도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이상돈 중앙대 교수, 소설가 김훈·복거일, 이석연 전 법제처장 등 여론을 주도하는 인사가 망라됐다. 사실상 ‘중도’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한 인사도 있었지만, 진보와 보수라는 범주를 최대한 폭넓게 적용했다.

답변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더 심층적 분석을 위해, 오피니언 리더 100인의 답변 자료를 ‘의미 네트워크 분석’ 기법을 사용해 깊이 들여다봤다. 의미 네트워크 분석이란 전체 텍스트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거리와 연관관계, 한 단어가 다른 단어에 끼치는 영향력 등을 분석해, 말하는 사람 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담론의 지도’를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분석 기법이다. 이를 통해 2012년을 바라보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의 ‘머릿속’을 스캔하듯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소셜 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트리움(TREUM)이 〈시사IN〉과 공동으로 분석을 진행했다.

결과는 이구동성이었다. 시대정신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복지’였다. 진보 진영 최대 화두가 복지인 것은 예상됐던 일이다. 하지만 보수 인사들도 2012년 최대 화두로 복지를 꼽은 것은 인상적이다. 찬성과 반대를 떠나, 2012년 대선은 복지라는 화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핵심이라는 데 진보와 보수 오피니언 리더의 의견이 일치한 셈이다. 진보 인사들의 응답에서는 ‘복지’가 총 54회 등장했다. 보수 쪽에서는 총 43회 등장해 양쪽 모두에서 압도적 1위다(위 사진 〈표 1〉).

 

 

 

 

 


진보 “복지=정의”…보수 “복지=포퓰리즘”

100명의 답변에 대한 의미 네트워크 분석을 거쳐, 단순 출현 빈도가 아니라 담론 내에서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순서대로 키워드를 나열한 결과가 〈위의 표 2〉이다. 역시 진보·보수 모두에서 복지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나타났다. 단, 진보는 복지를 양극화의 해법이자 정의를 실현할 열쇠로 보는 반면, 보수는 복지가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포퓰리즘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해찬 전 총리(진보·정치)는 ‘평화복지 공동체’를 키워드로 제시하며 “시대적 소명을 다한 1987년 체제의 뒤를 이을 ‘2013년 체제’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체제여야 한다”라고 이유를 댔다. 장하준 교수(진보·경제)는 “15년간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모델이 빈부 격차와 고용 불안을 만들면서 사회적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라고 복지가 시대정신인 이유를 진단했다. 조희연 교수(진보·학계)는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보수적 실망’과 ‘진보적 실망’이 만나 탄생했다.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적 실망’의 요구가 ‘복지’로 구체화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보수에서도 복지를 시대정신으로 꼽는 응답이 쏟아졌다. 단, 긍정 평가 일변도인 진보와 달리 보수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갈렸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보수·경제)은 ‘복지정책 대 국가부채’의 대결을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정책이 모든 당의 득표 전략이 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 일어날 국가 연쇄 부도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두 개념의 충돌이 2012년의 화두다.” 다분히 복지의 위험을 경계하는 평가이고, 이것이 보수가 복지를 보는 기본 시각이었다. 반면 소수이지만 복지를 보수 어젠다로 수용하려는 목소리도 있었다. 윤평중 교수(보수·학계)는 “한국 사회는 더 이상의 양극화를 견뎌낼 수 없다. 분배와 복지를 통해 격차 사회를 해소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다”라고 답했다.

 

 

 

 

 

 


겨우 5년 만의 대역전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주요 후보가 경제성장을 말하던 2007년 대선 때에는 보수가 시대정신을 장악하고 진보가 우왕좌왕했다. 보수는 경제성장을 한국 사회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일종의 ‘만능키’로 제시했고, 진보는 대안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끌려다니다 참패했다. 이를 반대로 뒤집으면 정확히 지금의 담론 지형이 나온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전체 의미 네트워크에서 ‘복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지도를 추출해봤다. 즉, ‘복지’라는 키워드와 연관을 맺고 있는 키워드들의 지도를 그려본 것이다. 이를 통해 진보와 보수가 복지를 어떤 맥락에서 생각하는지가 드러난다. 그 결과를 알아보기 쉽게 표현한 것이 〈위 그림 1〉과 〈그림 2〉이다. 〈그림 1〉은 진보가 말하는 복지 담론 지도, 〈그림 2〉는 보수가 말하는 복지 담론 지도다.

양쪽 모두 복지를 말하고 있어도 담론의 실체는 영 딴판이다. 읽는 방향부터가 정반대다. 진보는 복지라는 ‘목표’를 향해 공세적으로 담론을 구성했고, 보수는 복지라는 ‘도전’에 대해 수세적으로 담론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진보의 복지 담론은 ‘밖에서 안으로’ 읽어야 한다. 동심원 가장 외곽에는 진보가 중시하는 가치들이 자리 잡았다. 공동체·상호부조·자치·평화·자립·공존 등이 중요하게 제시됐다.

그런데 이게 복지와는 무슨 상관일까. 두 번째 동심원을 보자. 이런 가치가 왜 무너졌는지, 진보가 내놓는 설명이 등장한다. 즉, ‘사회경제’적인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어 ‘평등’과 ‘분배’에 문제가 생기고 ‘삶의 질’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핵심 진단은 양극화다. 이로부터 한국 사회가 앓는 수많은 문제가 파생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복지’가 일종의 결론이자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2007년의 보수가 경제성장을 만능키로 제시했던 것과 판박이다. 박상훈 정치학 박사(학계·진보)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양극화·비정규직·저출산율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불평등의 심화’이므로, 복지를 키워드로 한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중심 의제가 될 것이다”라고 진보의 복지 담론을 대변했다.

보수 담론에서의 복지는 정반대다. ‘안에서 밖으로’ 읽어야 한다. 2007년의 진보에게 ‘성장’이 그랬던 것처럼, 2012년의 보수에게 ‘복지’는 일종의 도전이다. 피할 수는 없다. 맞서 싸워야 할지 흐름에 동참해야 할지 선택만 남는다. 〈그림 2〉를 보자. 동심원 한가운데, ‘복지’라는 도전이 일단 주어졌다. 두 번째 동심원을 보면, 복지란 무엇보다도 ‘반값 등록금’이나 ‘무상급식’ 같은 ‘포퓰리즘’으로 이해된다. 이는 ‘재정’ 위기를 초래해 ‘국가 부도’의 위험을 높인다. 복지라는 시대정신이 보수에게 도전인 이유다.


공세적인 진보, 수세적인 보수

바깥쪽 동심원을 보면, 보수 역시 ‘복지’라는 도전이 발생한 이유로 ‘중산층 감소’와 ‘양극화’를 꼽는다. 현실 인식에서 진보 담론과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또한 보수는 ‘정치권’을 강하게 의심한다. 선거를 위한 포퓰리즘 경쟁을 펼쳐 복지라는 요구를 증폭시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영배 경총 상임부회장(경제·보수)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포퓰리즘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도한 복지와 재정 지출은 결국 사회와 경제의 근본을 위험하게 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으므로 시대정신은 포퓰리즘 극복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해 보수의 관점을 대변했다.

 

 

 

 

 

 


그렇다면 보수의 대책은 무엇일까? 분명하지 않다. ‘자유주의’와 ‘자립자존’ 정신을 강화해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기도 하고(경제·공병호 소장, 시민사회·소설가 복거일 등), ‘공동체’와 ‘통합’을 강조하기도 한다(정치·유승민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형준 대통령 사회특보 등). 앞의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에 충실한 해법으로 주로 경제계와 학계에서 선호하고, 뒤의 것은 고전적 보수주의에 가까운 해법으로 정치권에서 선호한다. 전자가 시장원리주의 색채가 강하다면, 후자는 온정적 색채가 더 강하기 때문에 학계·경제계와 정치권의 선호도가 엇갈린다고 볼 수도 있다.

〈시사IN〉과 트리움은 진보와 보수는 물론 정치·경제·학계·시민사회 등 응답자의 영역에 따라서도 각각의 담론 구조를 분석해봤다. 즉, 2012년 시대정신을 말하는 담론 지도 총 8개를 얻을 수 있었다. 위의 〈그림 3〉부터 아래 〈그림 6〉까지는, 그중에서도 특징이 두드러지고 대조가 분명한 정치 분야와 경제 분야 담론 지도다. 순서대로 진보·정치, 보수·정치, 진보·경제, 보수·경제 담론 지도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의 담론 지도는 읽는 방향부터 다르다. 진보 지도는 아래에서 위로, 보수 지도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분석을 총괄한 트리움 김도훈 대표는 “진보는 궁극적으로 복지라는 어젠다를 지향하는 담론 구조(상향식), 보수는 양극화 등 사회현상의 결과로 등장한 복지라는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담론 구조(하향식)를 갖고 있다”라고 차이를 지적했다. 따라서 진보의 담론 지도는 여러 현실 인식에서 시작해 한 점(복지라는 목표)으로 수렴되는 반면, 보수의 담론 구조는 한 점(복지를 요구받는 현실)에서 시작해 합의된 해법 없이 여러 갈래로 발산한다. ‘공세적인 진보’와 ‘수세적인 보수’라는 큰 틀은 여기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담론 지도에서 각 키워드 간의 연결은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같은 색깔은 ‘동의어 블록’을, 키워드의 크기는 담론에서의 중요도를 뜻한다. 진보·정치 지도(〈그림 3〉)를 보자. 이명박 정부가 불러온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하고(파란색), 새로운 한반도 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붉은색), 경제 문제도 성장이 아니라 기득권을 해체하고 사회 합의를 만들어나간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노란색). 이런 세 차원의 진단은 ‘경제 민주화와 남북관계의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 복지국가’ 모델로 집약된다(초록색).

이명박 정부 초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남북관계·서민경제 위기’라는 이른바 ‘3대 위기론’을 제시한 바 있다. 정치·진보 지도를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제시한 프레임이 사실상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이에 반해 진보 정당에서 더 강조하는 노동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는 상대적으로 담론의 주변부에 위치했다.

 

 

 

 

 

 

 

 


반면 보수·정치 지도(〈그림 4〉)는 ‘양극화’라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대해 2007년의 보수가 자신만만하게 ‘성장’이라는 답을 내놓았다면, 2012년의 보수는 태도가 좀 더 모호하다. 양극화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복지 요구가 거세지면 결국 ‘퍼주기’로 정부가 빚더미에 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을 만들 방법을 찾기는 해야 한다(푸른색). 하지만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라는 핵심 과제에 대해 보수가 내놓는 답은 ‘통합’ ‘공정’ ‘나눔’처럼 추상적 수준에 머문다.


“유행 타는 한국 담론 시장”

진보·경제 담론 지도(〈그림 5〉) 역시 이명박 정부가 양극화를 가속화했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초록색). 대기업을 비롯한 각종 이익집단이 정의를 왜곡한 현실을 국가가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붉은색). 지나친 시장 경쟁이 불평등을 키우고 중산층을 붕괴시켜 생존의 불안을 불러온 현실에서, 결국 경제정의·사회통합·공존의 열쇠는 복지로 수렴된다(노란색).

반면 보수·경제 지도는 붉은색 단색이다. 의미 덩어리가 사실상 하나로 단순하다는 뜻이다. 양극화라는 현실에서 출발은 하되, 재정 문제를 일으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는 복지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포퓰리즘에 휩쓸려 일을 망칠까 걱정이다. 하지만 대안은 분명하지 않다. 지도자들이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잘해야 한다’는 요구 정도가 전부다. 성장이 대안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2012 시대정신’을 기획할 때 예측했던 것 이상으로, 오피니언 리더층에서 복지 담론의 위력은 강력했다. 그 때문에 2012년 대선에서 중요한 과제가 될 교육, 과학기술, 남북관계, 동북아 외교 등의 주제가 과도하게 주변으로 밀리거나 심지어 아예 증발하기도 했다. 2012년은 한반도 주변 4강 중 3개국(미국·중국·러시아)이 동시에 권력교체기를 맞는 해이지만, 이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분석을 총괄한 김도훈 대표는 “이번 분석에서 복지 담론이 가지는 위력을 보수에서도 상당히 크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다만 진보는 국내 이슈 중에서도 한 갈래인 복지 이슈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보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보수 본연의 임무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한국 담론 시장이 지나치게 유행을 타는 인상도 준다”라고 총평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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