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아침은 부지런합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비는 그쳤지만 아스팔트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습니다. 때맞춰 바람이 불었습니다. 젖은 몸과 마음을 말리는 바람이었습니다. 7월10일 새벽 5시, 어슴푸레 날이 밝기 시작하니 지난밤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습니다. 경찰 차벽 넘어 하늘로 솟은 크레인이었습니다. 혹시나 당신이 계신 85호 크레인이 보일까 싶어 깡총 깡총, 있는 힘껏 발돋움을 해봅니다. 고작 1km라고 했습니다. 시민들이 운집해있던 부산 영도 봉래3거리와 한진중공업의 거리가요. 그러나 아무리 제자리에서 뛰어 봐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분했습니다. 85호 크레인 앞으로 아무리 가까이 간다 한 들 만질 수도, 안아줄 수도 없을텐데. 그저 손 한 번 흔들어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들이, 가로막혔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로 향했던 7월9일, 비는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폭우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겐 축제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려 185대의 버스가 꽉꽉 채워져 부산역으로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역 광장을 빽빽하게 메워,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심보선·김선우·송경동 등 시인도 거리로 나왔습니다. 시인은 왜 거리로 나왔을까요. 시가 거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보선 시인은 말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게 너무나 시적이고, 여러분의 존재 하나하나가 시입니다.”

그런 시 같은 사람들이 부산에 온 이유를 말했습니다. “최소한의 표현을 하고 싶어서” “한번쯤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분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저도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일면 다양한 이유로 모인 것 같지만, 그 말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다 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불안’을, 당신이 대신해 싸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모품처럼 언제 어떻게 해고를 당해도 딱히 구제될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비정규직을 ‘우대’하는 세상에서, 모두가 노동자이지만 여전히 노동이 천시 받는 세상의 그 최전선에, “그건 잘못됐다”라고 당신이 몸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 쓴 이야기는 읽다가 마음이 아프면 덮어 두었다 나중에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쓴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07)를 그렇게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의 현장에서 사람이 제 몸으로 쓰는 이야기는, 나중이 없습니다. 그게 지금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 온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인 사람들은 ‘현장’을 보기 위해 비를 뚫고 걷기로 했습니다. 부산역에서 영도다리를 건너 당신이 있는 한진중공업 앞까지. 처음 보는 광경에 부산 시민들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물론 “뭐하는 짓이냐”라며 버럭 화를 내시는 분들도 있었고, “수고한다, 욕본다.”라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연신 격려를 건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마음과, 각자의 사실들이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85호 크레인을 걸어 내려오는 김진숙을 상상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당신 대신 경찰의 차벽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한 달간 여러분을 목이 메도록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꼭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새벽 1시40분, 수화기 너머 당신의 목소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우유빛깔 김진숙, 사랑해요 김진숙!”을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료와 우스개를 나눴습니다.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우리가 갈 수 없으니, 우리가 보고 싶어진 당신이 내려오진 않을까. 85호 크레인을 당신이 뚜벅뚜벅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습니다.

경찰과 사람들 사이에는 긴 시간 승강이가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차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난타’하듯 경쾌하게 차벽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강제진압 중단하라’고,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피켓팅을 하고 차벽 가득 스티커를 붙여두었습니다. 그러나 차벽은 견고했습니다. 어떻게든 차벽을 넘으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 모두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기에, 참 악몽 같은 밤이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온몸이 떨렸습니다. 방패로, 곤봉으로, 최루액 총으로 무장한 전경들의 얼굴이 앳됐습니다. 쿵쿵쿵, 와아악,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들이 내질렀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습니다. 이들은 골목으로 숨어 들어간 사람을 기어이 곤봉으로 내리쳤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버둥대는 사람을 기어이 잡아채 호송버스에 실었습니다.

국회의원이고, 여성이고, 청소년을 분간치 않고 최루액 총을 겨누었습니다. 살수차를 통해 콸콸콸 뿜어 나오던 시퍼런 물 역시 최루액이었습니다. 매캐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절로 일었습니다. 50명이 연행되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85호 크레인에서 트위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던 당신이, 차마 그 소식을 볼 수 없어 그만 트위터를 꺼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밤, 사람들은 살수차 물줄기에서 ‘무지개’를 봤습니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던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희망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쉬이 잠들지 못했던 밤이 지나갔습니다. 폭우가 지나간 자리에는 폭염이 대신했습니다.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사람들은 당신을 만나겠다고, 버텼습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일주일간 접었다던 종이배를 선물했습니다. 모두 1만개였습니다. 나눠주던 가족대책위 도경정씨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남편들이 쇳조각 먹어가며 배를 만들던 무딘 손으로 지난 일주일간 노숙하면서 종이로 종이배 만 장을 접었습니다. 진짜 배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눈가를 훔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화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우리는 결국 당신에게, 가지 못했습니다.

“무장한 경찰과 용역이 무시로 드나드는 곳, 전기마저 끊긴 고립된 이곳, 저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저라고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크레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게는 너무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들입니다. 고맙고, 그리고 죄송합니다. 희망버스가 있는데 제가 뭔들 못하겠습니까. 저들이 폭력으로 못 오게 막는 것도 바로 그 희망입니다. 작은 희망의 풀씨 하나가 어떻게 꽃밭을 만드는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7월10일 오후 3시, 우리는 당신을 다시 한 번 전화로 만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만난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의 푸른색 작업복 왼쪽 가슴에는 ‘한진중공업’ 글자가 시퍼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몸담고 있는 회사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만난 그 분이 선뜻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힘주어 꼭 잡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내내 조금은 냉정해지려고 꾹꾹 누르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서로의 살갗이 실체로 와서 닿는다는 것, 체온을 나눈다는 것이 부르르 마음을 진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던 당신이 그렇게 거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외쳤던 구호처럼 "우리 모두 소금꽃"이고, "우리 모두 김진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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