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같은 충격적 사건은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큰 상흔을 남겼다. 그 현장에서 딸의 등교를 돕던 나는 아직도 하늘의 비행기를 보면 트윈 타워가 흐릿한 영상으로 겹쳐 나타난다. 전형적인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다. 많은 미국인도 과거 베트남 패배의 상흔에 이어 이 9·11 테러의 외상으로 고통받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빈라덴의 죽음은 오랜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공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느 방향으로 탈출하느냐’이다. 특히 미국의 리더 오바마 대통령의 마음 상태가 어디로 향하느냐는 미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중요한 파장을 지닌다. 사실 일반 시민만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에게도 마음의 미묘한 상태는 정책 노선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 후보 시절과 대통령 임기 초반 오바마의 주된 마음 상태와 이를 표현한 정체성은 ‘평화의 사도’였다. 그는 군사주의적 노선을 추구한 부시 행정부에 맞서 이라크 전쟁 반대를 용기 있게 선언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스타로 떠올랐다. 오바마는 취임 후 첫 국제 인터뷰 상대로 선택한 알자지라 방송과의 회견에서나 중동을 직접 방문했을 때, 상호 의존과 상호 존중의 평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역설해 감동을 준 바 있다. 이 시기 그의 주된 구호는 ‘전쟁이냐 평화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그는 뜻하지 않게 2009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상식 연설의 주제는 평화가 아니었다. 노벨평화상 주최 측을 곤혹스럽게 만든 그 주제는 바로 전쟁이었다. 그는 정치사상가인 라인홀드 니버의 ‘정의의 전쟁 이론’을 활용해 자신은 간디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정의의 전쟁 사도임을 선언하여 전 지구를 놀라게 했다. 이 시기 그의 주된 구호는 ‘정의 대 부정의의 전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진보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발 나를 제2의 간디나 만델라로 기대하지 마라. 난 전 지구적 제국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수장이다. 하지만 난 이 맹수를 길들이며 전쟁을 통해 정글의 부정의를 제압하여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이제 빈라덴 암살은 오바마 마음 상태의 제3기를 열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게 무엇이 될 것이냐이다. 예리한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얼마 전 한 아침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박 같은 작전을 성공리에 지휘한 오바마는 이제 자신의 판단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외교 노선을 이끌어가리라 전망했다. 과거 쿠바 미사일 위기를 성공리에 마무리한 케네디가 그러했듯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두 가지 다른 길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바마, 거시적 시야 전면 재검토해야

굿윈은 잊고 있지만 케네디 행정부 관계자들도 그러했다.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냉전의 가공할 위험성을 절실히 자각했다. 따라서 그는 미·소 간의 핫라인 개설, 카스트로 쿠바 서기장과의 비밀 정상회담을 기획하다가 비극적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동시에 맥나마라 국방장관 같은 케네디 정부 출신들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과의 벼랑 끝 전술에 재미를 들여, 이후 위협적인 외교 노선(이를 학문적으로는 강압적 외교라 칭한다)을 신중하지 않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다 수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고 만다. 부시 시절 극적으로 부활한 네오콘도 이 강압적 외교 노선을 전술이 아닌 극단적 종교 교리로 승격시킨 이들에 불과하다.

만약 정의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오바마의 마음 상태와 빈라덴 암살의 자신감이 결합된다면 그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구적 전쟁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후세의 미국 역사책에 불행한 시기의 무능한 리더로 기록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이제라도 제국의 쇠퇴에 대해 더 절실히 자각하고 연착륙을 위한 전면적 노선 재검토를 시작한다면, 그는 불행한 시기의 지혜로운 리더로 기록될 것이다.

이미 치열하게 진행되는 아프간 철군 논쟁 이전에 지금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거시적 시야의 전면 재검토이다. 즉 미국의 현자들을 모아 자신의 마음 상태와, 전 지구적 맥락 속 미국을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그가 어떠한 마음의 상태로 기울어지는가는 이후 미국과 지구적 질서의 운명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기자명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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