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됐다. 학교별 수능성적이라는 핵폭탄급 데이터가 공개되면서 ‘수능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에게서 수능성적 원자료 분석결과를 넘겨받아 지난 10월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에 걸쳐 집중 보도했다. 애초에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연구 목적으로만 이용한다’는 단서를 달아 제공했던 수능성적 원자료가 언론을 통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조 의원 외에도 6명의 의원이 교과부로부터 원자료를 받았지만 언론에 공개한 것은 조 의원이 유일하다.

학교별 수능성적이 일간지에 공개되면서 학교간 서열화가 시작돼 사실상의 고교 등급제가 등장할 것이라는 염려가 나온다. 보수언론의 숙원이었던 ‘평준화 흔들기’도 거세지는 기세다. 조선일보는 “평준화 안 된 평준화 고교”(13일자 1면), “쉬쉬 35년… ‘가짜 평준화’에 속았다”(14일자 1면 머릿기사) 등의 기사를 쏟아내며 고교 평준화 제도를 맹폭했다.

1년의 냉전, 두 차례의 열전

전쟁이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게 아니듯, 수능성적 원자료 공개를 둘러싼 샅바싸움도 역사가 길다〈표 1〉. 지난해 18대 국회가 열린 후부터 국회 교과위 소속의 여야 의원실을 중심으로 1년여의 신경전이 있었다. 선봉에는 늘 조전혁 의원이 나섰다. 18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전교조 저격수’로 보수언론의 주목을 받은 조 의원은 지난해 9월17일 교과부 장관에게 수능성적 관련 자료를 처음으로 공식 요구했다. 마침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주도하는 이주호 교과부 차관도 공인된 ‘수능성적 공개론자’다. 공개는 시점이 문제일 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1년여의 밀고 당기기를 거쳐 올해 7월20일 성적 열람이 시작됐다. 열람에 참여한 한 의원실 보좌관은 “보안요원이 입회한 가운데, 파일은커녕 메모 한 장 가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원자료는 눈으로만 보고, 돌아가서 우리가 필요한 데이터가 어떤 건지 설계해서 요청하는 방식이었다”라고 말했다. 수능 원자료라는 ‘원석’을 누가 더 잘 세공해서 여론전에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를 두고 본격 경쟁이 시작됐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자신의 교육이념을 입증하는 자료를 뽑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9개 의원실에서 요청한 분석자료만 140여 건에 달했다. 한나라당 의원 7명, 자유선진당 1명, 민주노동당 1명이 자료를 요청했다.

두 달 뒤에 ‘실탄’이 공급됐다. 9월18일 금요일부터 교과부는 각 의원실에서 요청받은 분석자료를 제공했다. 232개 시·군·구별 수능성적 분석을 비롯한 자료가 9개 의원실에 배달됐다. 주말을 기다려 월요일인 9월21일부터 ‘수능 1차대전’이 발발했다.

수험생을 둔 학부모로 인산인해를 이룬 한 학원의 입시 설명회 풍경(위).
평준화 지역 학생이 성적 오른 경우 더 많아

뚜껑을 열어보니, 8대1로 불리해 보였던 진보 쪽의 공세가 오히려 거셌다. 민노당 권영길 의원은 일주일 새 잇따라 3개의 보고서를 쏟아냈다. 첫 번째 보고서는 교육격차와 자산·소득 격차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수능성적 상위 20개 시·군·구는 거의 어김없이 강남·서초구 등 자산수준이 높거나 특목고·자사고·기숙형 자율고가 있는 지역이다. 두 번째 보고서에서는 특목고·자사고에 힘입어 수능성적 상위권에 오른 지역에서 이들 특목고·자사고 변수를 제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줬다. 상위 10위권에 있던 지역이 20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는 등 성적이 크게 후퇴했다.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지역 학력을 올리겠다며 특목고 유치를 공약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다.

세 번째 보고서는 특히 의미심장했다. 교육과정평가원의 학업성취도 표집조사 자료를 이용해 평준화 지역 학생과 비평준화 지역 학생의 성적 향상 정도를 비교했다. 고교 1학년 때의 성취도가 전국 평균 이상인지 이하인지를 따진 후, 그 학생의 수능성적이 전국 평균 이상인지 이하인지를 따져 비교한 것이다. 성적이 평균 이하에서 이상으로 올랐으면 성적 상승, 그 반대면 하락으로 표기했다. 그 결과가 〈표 2〉, 〈표 3〉이다. 표를 보면, 성적이 오른 학생은 평준화 지역이, 내린 학생은 비평준화 지역이 더 많다. 평준화가 경쟁을 제거해 학력 저하를 불러온다는 보수언론의 프레임과는 정반대 결과다. 사교육 효과, 지역 효과 등이 충분히 통제되지 않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평준화 = 하향평준화’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는 유력했다.

반면 한나라당 교과위원 중에서는 박보환 의원이 교과부로부터 받은 지역별 수능성적 순위를 별다른 분석 없이 공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수능 1차 대전’이 정리됐다.

이때부터 한나라당 교과위 의원실에서는 “데이터가 ‘섹시’하지 않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지역별 순위 정도로는 언론의 주목을 끌기 어렵다는 의미다. “기획력에 밀렸다”는 자성도 나왔다. 어느 모로 보나 학교별 성적 공개는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카드였다. 보수언론도 사설과 칼럼을 통해 수능 원자료 공개를 요구하며 지원사격을 했다.

다시 조전혁 의원이 나섰다. ‘1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9월22일, 조 의원은 교과부 장관에게 수능 원자료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장관은 ‘연구 목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이를 받아들였다. 열람만을 허용하고 의원실 요구자료 중 조금이라도 학교 서열과 관련된 자료는 공개를 거부했던 7월의 태도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지만, 교과부는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모두 7개 의원실에 수능 원자료가 제공됐고, 조 의원에게서 분석결과를 건네받은 조선일보가 10월12일자로 이를 터뜨렸다.

나흘간 쏟아진 조선일보의 보도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됐다. 첫째, 학교별 수능성적 순위라는 따끈따끈한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자녀를 가진 독자에게 솔깃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도 13일자 기사에서 “(진학 학교를 고르는 데) 입소문에 의존했는데, 이번에 학교별 수능 평균을 보니 확 와닿더라”는 학부모 의견을 소개했다. 둘째, 평준화 교육이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보도 이틀째와 사흘째인 13, 14일 연달아 1면에 평준화 비판 기사가 올랐다. 언뜻 보아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 같다. 지면 가득 펼쳐진 수백 개 학교의 ‘서열’을 보다 보면 인과를 따지기 전에 우선 기가 질린다.

조선일보, 데이터와 진단이 따로 논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선일보가 ‘평준화 교육은 실패’라는 딱지를 붙인 근거를 찾기가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13일자 조선일보는 서울의 경우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의 수능 3개 영역(언어·수리·외국어) 평균 합산점수가 각각 311.5점, 311.4점, 299.5점으로 나타난 반면, 성동·구로·중랑·관악구는 270점대로 하위권을 형성했다며, 평준화 제도가 학력을 평준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썼다. 다음 날인 14일에는 아예 ‘가짜 평준화’라는 프레임을 제시하며 분석기사를 실었다. 역시 평준화 제도하에서 학력 격차가 난다는 게 요지다.

격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 격차가 ‘평준화 때문에’ 난 것인지, ‘평준화에도 불구하고’ 난 것인지를 조선일보가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