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김윤태
영국 노동당은 이념적으로 극단을 오간 바 있는 정당이다. 한때 영국 노동당은 사민주의 정당 가운데에서 ‘가장 좌익’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비대한 복지 시스템을 운영했다. 그러다 대처의 보수혁명으로 16년 동안 야당 생활을 했고, 1997년 집권한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낙인찍혔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심지어 공공 서비스에마저 민간 부문을 끌어들일 정도로 시장의 역동성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존 좌파의 교리와 반대로 각종 규제를 극도로 완화해서 런던을 지구 최대의 금융센터로 건설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 노동당은 진보라기보다 신자유주의의 범주에서 많이 논의되었다.그러나 지금 우리가 영국 노동당을 논의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먼저 이 정당이 ‘변절’할 수밖에 없었던 상당히 타당한 이유가 기존 ‘노동당 이데올로기’에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 중 집권 경험을 가진 세력 일부는 영국 노동당 모델의 혁신을 열심히 벤치마킹한 바 있다. 다른 한편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궁지에 몰린 영국 노동당이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도 많은 사람의 관심거리다. 영국 노동당과 관련된 기사를 두 차례 게재한다.

세계 어느 나라든 ‘진보’로 분류되는 세력들은 ‘국가’와 ‘시장’,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공유해왔다.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는 그랬다.먼저 진보세력은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국가는 부유층에게 세금을 거둬 중저소득층에게 재분배하는 기구였다. 교육·의료·전기·교통·물 따위 기초생필품(공공 서비스)은, 반드시 국유기업(민간기업이 아니라)에 의해 시민에게 공급되어야 했다. 이런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진보의 목표였다.

그러나 ‘진보’는 시장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진보세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껏 해봤자 시장의 횡포를 막는 것이었다. 경쟁·기업가정신·혁신 따위는 불온한 용어였다. ‘시장의 역할’을 ‘국가의 역할’로 대체하는 것이 진보세력의 야망이었다. 한편 진보에게 ‘노동자 계급’은 그 자체로 ‘선’하고 진보적인 존재였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 사안은 일단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도그마’들은 1970년대 후반기 들어 영국에서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우파 정치세력은 진보정치의 물질적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며 장기 집권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영국 노동당의 재집권은 예전의 신념들을 발본적으로 뒤집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1990년대 초반부터 현지에서 지켜보고 연구해온 김윤태 고려대 교수를 만나 영국 노동당의 혁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89년 영국 보수당 집회에서 마가릿 대처 총리(앞)가 하늘을 찌르는 손짓을 하며 웃고 있다.
영국의 복지국가는 1970년대 말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 복지국가는 어떤 것이었나.영국 노동당은 20세기 초반에 창당되고, 중반에 집권해서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이 복지국가의 원리는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였다. 부유층에 누진적 소득세를 부과해 마련한 재정으로 모든 국민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다. 무상 의료서비스, 국민교육, 실업수당 등이 이에 속한다.

당시 영국의 국가는 매우 강했던 모양이다.영국 국가는 (재정지출·금리정책 등을 통해) 거시경제를 관리했다. 또한 코포라티즘(노·사·정 타협)의 기반 위에 완전고용을 추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1970년대까지 전화·전기·수도·가스·우편·철도 등 공공서비스를 모두 국영기업이 운영했다.

정말 강력하다. 국민의 기본적 생존에 필요한 산업들이 모두 국가 소유였던 셈이다. 이는 기초 재화 및 서비스를 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서였겠지만 폐해는 없었나.이런 공공 서비스들은 1970년대쯤 되면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다. 전화를 신청하면 몇 주,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국가보건서비스(NHS)가 실시되고 있었지만 병원에 한번 가면 기약도 없이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노동당의 블레어 전 총리가 1997년 총선 때 병원 대기 시간을 줄이겠다는 공약을 냈겠나. 영국은 자본주의 국가 중 이런 국영기업들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당시 전화·전기·의료 등의 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국가의 처지에서는, 굳이 더 나은 서비스를 더 싼 가격에 공급하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공공 부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용조건이 안정되어 있고, 더 일하나 적게 일하나 임금은 일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소비자인 시민 처지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해당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민 소비자’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노동자 등 진보세력에 대한 국민의 처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사태가 발생한다. 1978년 말의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다. 당시 공공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총궐기했는데 그 결과가 너무 참담했다.)

겨울 내내 미화원들이 파업해서 거리엔 쓰레기가 넘쳤고, 심지어 장의사들의 파업으로 시신을 매장할 수도 없었다. 교사들의 파업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고, 병자들은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이런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데, 집권 노동당은 해결 능력을 결여했다.(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엔 절호의 기회였다. 보수당은 노동자들을 격렬히 비난한 대가로 197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보수당은 노조를 무력화하는 한편 대대적인 기업구조 조정, 금융산업 등 서비스업 육성, 경제개방 등에 몰두했다.)

대처는 국영기업의 만성적자, 과다한 세금 등을 사민주의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공기업 민영화·규제완화·감세 등을 단행했다. 처음엔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점차 복지의 질이 저하되고 실업자와 노숙자가 증가했다. 실업률이 12%까지 치솟았다. 범죄율도 크게 상승했다. 심지어 미혼모들이 노숙자로 전락해서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내몰렸다. 이런 참상은 1997년 총선 당시 영국 노동당에 다시 기회를 제공했다.

대처의 보수혁명은 노동조합의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는 파업 중인 광산 노동자를 끌고 나오는 영국 경찰.
노동당을 집권시킨 사상적 혁신은 어떤 것이었나.
노동당의 전통적 신념인 국가의 경제개입(국유화·거시경제 관리), 코포라티즘, 복지국가 등을 버렸다.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1997년 당시 블레어의 공약 중 하나가 ‘이후 3년간 세금 안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노선에서, 케인스주의에서, ‘시장 관리’라는 ‘국가의 역할’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좌파들이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하자 블레어는 ‘제3의 길’이라고 맞받았다.

좌파 처지에서 시장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의 ‘중도’를 노린 것인가.“블레어 역시 시장의 역동성을 강하게 믿었다. 그래서 정부의 금리결정 기능을 ‘독립된 중앙은행’으로 넘겼다. 국가의 거시경제 관리기능을 포기한 거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을 차단하기 위해 국가채무를 국내총생산(GDP)의 40% 이내로 규정해 재정지출을 억제했다. 재정정책을 통해 수요를 이끌어내는 전통적 케인스주의를 폐기하는 조치였다.

전통적 사민주의에서는 국유기업을 통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는데.블레어는 1994년 이후 4년에 걸친 끈질긴 시도를 통해 노동당 당헌 4조인 국유화 항목을 삭제했다. 또한 노동당의 의사결정에서 노동조합의 의견이 무조건 3분의 1을 차지하도록 설계된 ‘블록 투표제’를 폐기했다.

ⓒBloomberg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
영국 노동당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기를 포기했다는 말로 들린다.인구학적으로, 그리고 산업구조 차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영국의 전체 산업에서 제조업 비중이 크게 떨어져 육체 노동자의 규모 자체가 줄어든 데다 노조 가입률도 엄청나게 하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당 처지에서도 중산층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심지어 당의 깃발도 적기에서 붉은 장미로 바꿨다. 이런 과정 속에서 노동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이행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국 노동당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16년에 걸친 대처 집권기에 영국 산업구조에서 제조업이 거의 소멸되었다.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대로 떨어졌는데 노동자의 수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 대신 성장한 것이 바로 방송·음반·광고·금융·보험 등의 서비스산업이었다. ‘노동’보다는 ‘지식’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들이다. 그래서 블레어 역시 예전의 노사 간 타협(코포라티즘)을 다시 살려내려고 시도하기보다 ‘지식’의 생산요소적 성격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른바 지식기반 경제다.(지구화된 지식정보사회, 즉 지식기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지식’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정책 이슈는 ‘교육’일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지식을 쌓은 시민만이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고,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일자리는 계속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결국 진보 정당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빈곤층을 비롯한 시민에게 우량한 ‘교육 서비스’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 된다.그래서 김윤태 교수는 영국 노동당이 “교육, 노동자들에 대한 훈련, 기술개발 등 인적자본 투자에 주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교육 정책은 경제발전 인프라인 동시에 복지정책이기도 하다.)

블레어는 복지 개념을 혁신했다. 국가가 개인의 각종 위험(리스크)을 일일이 챙기는 과거의 복지 개념 대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복지를 제안했다. 영국 노동당은 이를 ‘적극적 복지’라고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국가의 역할은 개인이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의 ‘교육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미취학 아동에게 조기 교육을 실시하고 아동보육에 대규모 투자지원을 한다. 아동발달지원계좌(저소득층 아동이 개설한 계좌에 가정과 국가가 같은 금액을 장기 적립해서 이 아동이 성장한 뒤 학자금·창업자금 등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도 있다.적극적 복지는 결국 신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책임성(responsibility)을 강화하자는 이야기와 통하는 것 같다.

적극적 복지는 결국 신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책임성(responsibility)을 강화하자는 이야기와 통하는 것 같다.실업자에게 실업수당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취업할 수 있도록 교육과 재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재훈련 프로그램에 불응하는 실업급여 대상자는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공기업 민영화로 떼돈을 번 기업으로부터 ‘횡재세’를 징수해 청년실업자 교육 프로그램에 투자한 사례도 있다. 다른 한편 장기 결석아동의 부모에 대해서는 자녀수당의 지급을 중단한다. 노동을 기피하며 복지혜택만 누리는 모럴 해저드를 차단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영국 신노동당의 성과를 짧게 정리한다면.지난 10년 동안 노동당 정부는 거시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증가시켰다. 그래서 실제로 아동빈곤율과 청년실업률이 상당히 줄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세금 징수를 늘리지 않으면서 복지재원을 올리기는 매우 힘들었다. 너무 찔끔찔끔 올려서 충분한 개혁이 불가능했던 것 같다. 더욱이 누진세율이 낮은 데다 금융소득 관련 세율까지 낮게 유지하는 바람에 최상층 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지구화로 국가 간 경계선이 대폭 낮아진 상황이다. 일국 내에서 시행되던 사민주의는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것일까.고민해봐야 한다. 사민주의 정책 때문에 세금을 올리면 자본이 다른 나라로 나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조업이 강한 스웨덴·독일 등은 기업의 해외 이전이 어렵다. 물론 금융 등 서비스 산업까지 규제하기는 쉽지 않다.

김윤태 교수는 ‘제3의 길’이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가능한 길인지 묻자, “신자유주의와 통화주의를 뛰어넘는 모델은 아닌 것 같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평등, 책임과 권리, 통화주의와 케인스주의 등 대립적 개념을 타협시키려 한 시도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평가했다. ‘제3의 길’의 주창자 중 한 명인 앤서니 기든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생각났다.“우리는 국가와 시장을 인민의 종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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