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이보영이 연기한 ‘고아인’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워커홀릭이다. 하우픽처스·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 제공

2022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의 후속작 〈대행사〉는 회의적인 시선 속에서 방영을 시작한 작품이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전작과의 성적 비교, 톱배우 이보영을 제외하면 다소 무게감이 덜한 캐스팅, 극성이 큰 장르물이 아니라는 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실제로 〈대행사〉의 서사 구조는 매우 익숙하다. 주인공 고아인(이보영)의 성공기는 현대 여성의 대표적인 성장 서사인 ‘칙릿(chick literature)’ 유형에 속하고, 여기에 K드라마 ‘사골’ 소재인 재벌가 이야기를 더했다. 전도연·정경호라는 막강 투톱과 입시라는 민감한 소재를 내세우고, 범죄스릴러 장르까지 결합한 경쟁작 〈일타 스캔들〉(tvN)과의 싸움에서 누가 봐도 불리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2월26일 종영된 〈대행사〉는 기대 이상의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평가된다. 진부하기까지 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고아인이 위기를 극복하고 미션을 하나씩 성공시키는 과정이 매회 치밀하고 흡인력 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점은 여성 서사로서의 성과다. 2015년 무렵부터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가장 발 빠르게 반영한 드라마계에서 여성 서사의 지평이 꾸준히 확대되는 가운데에도, 〈대행사〉의 성취는 꽤 흥미로워 보인다.

그 성취의 핵심에는 고아인이라는 캐릭터가 위치한다. 극 중 거대 광고대행사 VC기획의 제작팀을 이끄는 고아인은 성공에 집착하는 워커홀릭이다. 완벽주의자에 업계 최고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남성 중심의 조직 질서에서 차별받는 여성인 데다 지방대 출신에 대한 편견이 더해져 승진이 쉽지 않다. 그럴수록 성공에 목매는 고아인에게 그야말로 기적 같은 승진의 기회가 찾아온다. VC기획 최초 여성 임원의 자리였다. 그러나 곧 이 자리가, 여성 친화 기업 이미지 홍보를 위한 “얼굴마담” 역임을 깨달은 그는 아예 “최초를 넘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서기로 결심하고 끝내 목표를 달성한다. 이 과정에서 고아인은 쉬지 않고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직업적 야심이 로맨스 욕구를 추월

현대 여성 대중 서사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특징은 여성의 사회적 성취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칙릿’이 주류 장르로 안착한 주요인은 그것이 로맨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직업적 성취도 포기할 수 없는 여성들의 갈등을 그려냈다는 데 있었다. 요컨대 ‘칙릿’은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고자 하는 여성들의 자기계발 욕망과 전통적인 로맨스가 타협한 결과물이다. 이 같은 칙릿은 외환위기 이후 심각한 고용불안을 겪은 한국 여성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 분야의 원조 격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앤 더 시티〉가 큰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MBC), 〈내 이름은 김삼순〉(MBC), 〈막돼먹은 영애씨〉(tvN), 〈달콤한 나의 도시〉(SBS), 〈스타일〉(SBS)과 같은 한국형 칙릿 드라마 유행으로도 이어졌다.

‘칙릿’ 열풍이 수그러든 뒤에도, 여성 대중 서사는 꾸준히 여성의 성공욕과 야망을 집중 조명하는 방향으로 진화해갔다. 특히 앞서 언급된 페미니즘 리부트는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을 한층 증폭시킨 계기가 된다. 가령 〈WWW〉(tvN)는 워커홀릭 여성들을 대거 등장시켜, 그들의 직업적 야심이 로맨스 욕구를 추월했음을 알린 대표적 사례다. 그 이듬해 방영된 〈하이에나〉(SBS) 역시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이 요구받는 최소한의 미덕, 즉 ‘호감형 캐릭터’의 한계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성공을 향해 가는 여성 캐릭터의 입체적 변화를 보여줬다.

이처럼 여성의 사회적 성취에 중점을 두는 최근 여성 서사 경향의 정점에 고아인 캐릭터가 있다.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위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서길 욕망하는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삶의 영역은 모조리 배제한다. 전인미답의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삶에 로맨스 따위는 들어설 여유가 없다. 〈대행사〉는 〈WWW〉 〈하이에나〉조차 포기하지 못한 멜로적 요소를 과감하게 제거하고도 큰 성공을 거둔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례다.

〈미스 슬로운〉(2016)에서 주인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메인타이틀픽처스 제공

이쯤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 2016년 영화 〈미스 슬로운〉이다. 2000년대 중후반 유행한 한국형 칙릿 드라마에 브리짓 존스의 자매들이 넘쳐났듯이, 최근 한국 여성 대중 서사 속 주인공들에게서는 매들린 엘리자베스 슬로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슬로운은 성공욕의 화신이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고야 마는 인물로 그려진다. 페미니스트 정치가로부터 ‘남성 생식기만 빼고 모든 걸 가진’ 인물, 즉 ‘명예 남성’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승리에만 집착하지만, 영화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그의 욕망을 오롯이 비춘다. 그 결과 영화는 페미니즘을 외치지 않고도 훌륭한 여성 서사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비로소 완전한 개성적 캐릭터로 존재한다.

‘여성의 욕망엔 이유가 없다’고 외친 〈WWW〉의 주인공 배타미(임수정)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는 〈하이에나〉의 정금자(김혜수)는 바로 이 슬로운의 후배들이다. 특히 〈대행사〉의 고아인은 엘리자베스 슬로운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캐릭터다. 두 사람 모두 약물의 힘까지 빌리며 잠잘 시간을 아껴 일에 쏟아붓고, 로맨스에는 관심조차 없다. 엘리자베스 슬로운과 고아인은 여성 대중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인물이지만 그들의 약물의존은 그 성취를 위해 몇 배로 노력해야 하는 여성들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고아인의 성공은 여성 서사의 유의미한 성취이자 씁쓸한 그림자다.

기자명 김선영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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