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5일 오전 10시쯤 서울광장에 위치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빨간 목도리를 두른 유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앞서 서울시는 이날 오후 1시까지 유가족들이 세운 분향소를 자진 철거하라고 통보한 상태였다. 서울시가 제시한 행정집행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약 3시간. 그러나 유가족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분향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시든 국화꽃을 치우고 영정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분향소를 반드시 철거하겠다는 서울시의 엄포에 많은 유가족이 분향소를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서로 안부를 물었다. 한 유족은 “요새 몸이 더 안 좋아요. 그래도 오늘은 죽기 아니면 살기죠”라고 대답했다.
전날인 2월14일, 유가족들은 63일 만에 서울 녹사평역 인근 광장에 설치했던 기존 분향소를 정리했다. 이곳은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영정과 위패를 모신 장소다.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세운 이후에도 유족들은 쉽사리 녹사평 분향소를 철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광장 분향소 철거 기한을 하루 앞두고 유가족들은 녹사평 분향소를 정리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부모들은 차례로 녹사평 분향소에 걸려 있던 자식의 영정을 꼭 껴안았다.
이태원 참사 100일 추모제를 앞두고 서울시는 유가족에게 녹사평역 지하 4층을 추모 공간으로 제안했다. 유가족들이 이를 거절하자 서울시는 녹사평역을 먼저 제안한 것은 유족 측이라고 주장했다. 유족의 설명은 다르다. 유족 대리인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윤복남 변호사는 서울시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서울시가 최초로 유가족에게 제안한 공간은 민간 건물 세 곳이었다. 유족들은 민간 건물에선 추모 공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며 공공건물에 공간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시가 “공공건물에 공간이 없다”라고 답하자 윤 변호사는 “공간이 왜 없나. 용산구청도 있고 녹사평역도 있지 않나”라고 예시를 들며 따져 물었다. 서울시는 이때 나온 발언을 근거로 ‘유족 측이 먼저 녹사평역을 제안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말께 통화했을 때 서울시는 녹사평역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때 이후로 서울시와 논의한 적이 없다. 한 달이 넘게 지나 단순 예시였던 말을 근거로 ‘그때 당신이 녹사평역을 제안했지 않나’라고 하니 황당하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유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으나 유가족 측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지한씨의 어머니 조미은씨는 “대화를 먼저 차단한 것은 서울시다”라고 항변한다. 조씨에 따르면, 2월1일 오신환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유가족협의회 이종철 대표(이지한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씨가 녹사평역 지하 4층 공간을 거절하자 오 부시장은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미은씨는 “자신들이 먼저 대안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해놓고 이제 와서 또 협의를 하자고 한다. 그날 이후 오 부시장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2월15일 오후 1시, 서울시가 통보한 기한이 도래했지만 유가족은 분향소를 철거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진 서울광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이날 바로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울시는 “부득이 행정대집행 절차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라며 조만간 분향소를 철거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태원 참사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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