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지금도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 생각으로 밤잠을 못 이룬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는 김주삼씨(85)는 국토 분단이 낳은 이산가족이다. 하지만 여느 이산가족과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그는 귀순자나 피란민 출신이 아니다. 북한 황해도에서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어느 날 밤, 영문도 모른 채 괴한들에게 납치돼 남한으로 끌려왔다. 괴한은 우리 군에서 파견한 북파공작원 세 명이었다.

김주삼씨 납치가 발생한 때는 1956년 10월10일 자정 무렵. 황해도 용연군 용연읍 한 농가에 백령도에서 위장 어선을 타고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북파공작원 세 명이 나타났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소재 국군 제8263부대(공군 제25첩보대)의 백령도 파견대에서 보낸 공작원이었다. 백령도와 마주보고 있는 용연군 일대는 북한 인민군 부대와 시설이 밀집한 곳이다. 이날 밤 북파공작원들이 들이닥친 민가에는 당시 용연중학교 3학년생이던 김주삼 군(14)이 혼자 자고 있었다. 김군의 어머니와 다른 형제 셋은 인근 송화군 율리면에 있는 외가에 가 있었다.

소년 김주삼은 아직도 자신이 납치되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밤중에 우당퉁탕하더니 누가 잠자던 나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괴한 3명이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무작정 따라오라고 했다. 그들에게 이끌려 집에서 10리(4㎞)쯤 떨어진 바닷가에 도착하니 목선 한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목선은 북한 어부로 위장해 들어온 국군 첩보부대의 공작선이었다.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던 김주삼은 이 배에 실려 백령도로 납치됐다. 이튿날 날이 밝자 김군은 곧바로 해군 군함으로 옮겨져 인천을 거쳐 자동차로 서울 오류동에 자리한 공군 제25첩보대 기지로 압송됐다. 김주삼은 오류동 제25첩보대에서 집중 심문을 받았다. 첩보대에서는 공포에 질려 있던 김주삼을 향해 용연군 일대의 인민군 부대 위치와 동향 등 각종 군사정보를 캐물었다. 그러나 어린 중학생에게서 쓸 만한 군사정보가 나올 리 없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소득이 없자 내가 사는 마을 근처에 다리가 몇 개인지, 학교는 어디에 있는지, 논밭은 어디에 있는지, 산세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조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조사자 마음에 안 들면 계속 퇴짜를 맞으며 쥐어짜기식으로 한 달간 조사를 받았다.”

한국군 첩보대는 조사가 끝나자 김주삼을 다시 미군 첩보대에 이첩했다. 당시 미 공군 극동지구 첩보대(KF첩보대)는 오류동 한국 공군 제25첩보대 기지 한편을 사용하고 있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미군 조사관의 심문이 이어졌다. 한·미 양국 첩보대로부터 한 달 넘게 겨우 조사를 마친 소년 김주삼은 이제 북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순진한 착각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대에서는 조사를 마친 김주삼에게 막사 한 칸을 배정했다. 이어 온갖 부대 내 허드렛일을 강요했다. 고작 중학교 3학년인 북한 민간인을 ‘휴민트(인간정보)’로 삼겠다고 납치해 쥐어짜기식 조사를 벌인 뒤, 그것도 모자라 기약 없이 부대에 억류해두고 강제 노역을 시킨 것이다. 김씨의 억류 생활은 1959년 6월 말까지 4년 동안 이어졌다. 억류된 동안 김씨는 오류동 첩보부대 수송대에서 차량 보조로 온갖 잔심부름과 노무에 무보수로 동원됐다. 오직 음식과 잠자리만 제공받았다. 악몽 같던 첩보부대 억류 생활을 김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죽일까 두려워 설움을 참아가며 부대 허드렛일을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 폐디스토마에 걸렸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폐렴을 달고 살았다.”

당시 오류동 첩보부대원 가운데는 김주삼의 억류 생활을 딱하게 여겨 암암리에 돕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임중철씨(92)는 1955년부터 1960년 6월까지 공군 제25첩보부대에서 북파공작원을 수송하는 수송대원으로 근무했다. 1956년 말 오류동 기지에서 김주삼을 처음 만났다는 임씨는 당시 목격한 김주삼 납치와 억류 과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때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방첩’이란 말 한마디에 우리 대북공작 특수부대원들이 북한에 들어가 민간인을 납치해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다. 김주삼은 우리 동기생 공작대가 납치해왔는데 밤이면 부대를 둘러싼 철조망 울타리를 붙들고 서럽게 울더라. 어린 나이에 끌려왔으니 고향의 부모 형제가 오죽 그리웠겠나.”

임씨에 따르면, 당시 공군 제25첩보대는 오류동 본부 외에도 백령도와 강화 교동도에 파견 공작대를 두고 대북침투 공작을 벌였다. 임씨의 첩보대 동기생 박○○씨가 백령도 파견대원과 함께 황해도에 침투해 김주삼을 납치해왔다는 것이다. 백령도 파견대원은 오○○씨였다. 임씨는 “김주삼을 납치해온 박○○가 술자리에서 ‘내가 너무 어린 것을 데려와 별 쓸모도 없고 불쌍하게 되었다’고 한탄해 그때부터 김주삼을 만나면 잘 대해주려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김주삼을 납치한 박○○씨는 이듬해 동해안을 통한 새로운 북파공작 수행 중 사망해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1956년 국군 특수부대에 납치된 김주삼씨(오른쪽)와 서울 오류동 공군 제25첩보대에서 그를 돌봐주었던 임중철씨. ⓒ시사IN 이명익

황해도에서 서울 구로구로 바뀐 본적지

군 당국은 소년 김주삼을 납치·억류한 지 4년이 지나서야 오류동 첩보기지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 납치와 장기 억류 생활을 겪은 김주삼씨는 제대로 남한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부대에서 나갈 때 지난 4년 동안 겪은 일을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줄 알라고 협박하더라. 그러면서 남한에 내 호적이 없으니 오류동 첩보부대 근처의 수송대 문관이 살던 집에 임시 호적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해서 4년 동안의 납치·억류 생활을 끝낸 김주삼씨의 본적지는 원래 황해도 백연군에서 ‘서울 구로구 오류동 235번지’로 바뀌었다. 1959년 6월26일의 일이었다. 억류에서 풀려난 김씨는 자신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일부 첩보대원의 주선으로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이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970년대 이후 나무를 심고 가꾸는 기술을 익혀 경기도 일대에서 평생 조경 노동자로 살아왔다. 그 와중에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는 등 가정을 꾸렸지만 두고 온 고향과 부모 형제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주삼씨는 역대 정권에서 남북 화해 무드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추진할 때도 북에 있는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역대 정부에서는 김씨가 북한 고향을 방문하거나 이산가족과 해후할 수 있도록 하는 대상에 끼워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경찰을 통해 계속 감시했다. 지난 60여 년간 김주삼씨의 신세는 ‘탈북민 보호’라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감시를 받는 잠재적 대공 용의자였다. 그가 사회로 풀려난 뒤 역대 정권은 담당 경찰을 붙였다. 경찰은 김주삼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평생토록 감시했다. 특히 박정희·전두환 등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더 심했다. 그가 정보 경찰의 감시망 속에 북에서 온 가족 상봉을 꿈꾸는 일은 언제 화근이 될지 모르는 위험한 행위였다.

“1960~1980년대에는 간첩사건이 터질 때마다 북쪽에서 누가 넘어와 만나지 않았느냐고 추궁당했다. 경찰은 신발을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와 무턱대고 집 안 곳곳을 뒤졌다.” 북파공작원에게 납치돼 장기 억류 생활을 해온 북한 중학생 김주삼은 평생 대공 용의자로 낙인찍혔다. 김씨가 납치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시점이었다. 정부는 헌법상 국민의 지위를 지니는 김주삼씨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기는커녕 삶의 터전을 박탈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정신적·물질적 손해를 입혔던 것이다.

이런 사찰 행태에 김주삼은 몸서리를 쳤지만 한국에서 사는 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결국 극심하게 위축된 채 평생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다. 일부 사찰 경찰관이 참혹하게 살아가는 김씨의 모습을 목격하고 쌀가마나 부식 등을 놓고 간 경우도 있었다. 김주삼씨는 억류가 해제된 뒤 지금까지 안정적인 직업을 얻지 못한 채 일용 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왔다. 이로 인해 가족도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견디다 못한 김주삼씨의 자녀들이 나섰다. 이명박 정부 들어 김씨의 딸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풀어달라는 진정을 냈다. 그러나 정부는 피해 사실 인정 자체를 거부하는 등 잘못을 회피하기만 했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는 김주삼 납치사건을 확인하고, 그를 납치해온 북파공작원에 대해 특수임무 수행 공로로 뒤늦게 보상금까지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 국방부 소속 특수임무수행보상지원단은 오류동 소재 공군 첩보부대인 8263부대 백령도 파견대원 오○○씨 등이 1956년 10월10일 북한에 침투해 김주삼씨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오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 조사단은 당시 북파공작원 오씨에 대한 보상금 신청사건 참고인으로 김주삼씨를 불러 사실관계 진술조서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김씨에 대한 납치·억류 피해 사실도 다 확인됐다. 국방부는 이 조서의 신뢰성을 인정해 납치 공작원 오씨에 대한 특수임무 수행을 인정하고 보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정작 납치 피해자 김주삼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김주삼씨를 공군25첩보대에서 돌봐주던 임중철씨가 자신의 군 시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윗줄 오른쪽 두번째). ⓒ시사IN 이명익

‘법과 원칙’ 기다리는 ‘북한 주민’

이명박 정부 이후 국방부는 김주삼씨의 납치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도 후속 조처를 외면했다. 견디다 못한 김주삼씨 가족은 2020년 국가를 상대로 강제 납치와 억류 피해를 인정하고 손해를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김주삼씨 측은 국방부 특수임무보상지원단에 김주삼씨 납치에 가담한 공작원에 대한 특수임무보상금 신청 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관련 내역을 제공하지 않았다. 김주삼씨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지난해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자신의 억울한 납치·억류 피해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진정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어부 송환 사건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그 법과 원칙을 간절히 기다리는 ‘북한 주민’이 있다. 국군 특수부대가 군인도 아닌 민간인 신분의 어린 김주삼씨를 강제 납치하고 4년 동안 강제 억류 노역에 동원한 행위와 이후 경찰이 60년 동안 김씨를 감시 사찰한 행위는 반인도적 처사로 형법상 감금죄에 해당한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 끌려와 어언 백발의 노인이 된 김주삼씨는 60년째 가족이 애타게 기다리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대공 용의점이 없나 수시로 감시당하는 처지로 살아왔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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