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10일 강원도 속초시 근로자종합복지관에서 ‘동해안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 창립식이 열렸다.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참석했다. ⓒ시사IN 조남진

2021년 12월10일, 강원도 속초시 근로자종합복지관에서는 ‘동해안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창립대회가 열렸다. 속초·고성 지역 납북귀환 어부와 유족 등 30여 명이 시민사회단체와 법률가 등의 지원을 받아 ‘50년 묵은 한’을 풀기 위해 첫 삽을 뜬 것이다. 이들은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돼 가정이 풍비박산 난 수많은 동해안 납북 어부와 피해자 가족들을 찾아내 진실을 규명하고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를 토대로 피해자 명예회복 및 국가 배상을 신청한다는 계획이다. 시민모임 대표는 15세 때 속초의 오징어잡이 배인 해성호를 탔다가 납북귀환 어부가 된 김춘삼씨가 맡았다. 김춘삼 대표는 “납북귀환 어부는 본인만 만신창이가 된 것이 아니라 간첩 낙인이 찍혀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그 조작의 ‘원죄’를 바로잡아야 한다. 납북귀환 사건 자체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심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납북귀환 어부’란 대한민국 동해와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에 북한 경비정에 납치당하거나 태풍 또는 안개 등으로 방향을 잃고 월경했다가 북한에 억류된 뒤 돌아온 어부들을 의미한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1954년부터 1987년까지 납북된 어선과 선원은 각각 459척, 3651명에 달한다. 27척과 이에 승선한 선원 403명은 아직 송환되지 못했다.

북한이 한국 어선을 나포해 끌고 가기 시작한 때는 1957년 11월이었다. 한국 정부가 ‘12해리 영해’를 발효한 그해다. 휴전 후 한국은 동해상의 ‘어로 저지선’을 북위 38도 26분에서 휴전선 바로 아래인 38도 35분 45초로 변경해 운영했다.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한국 어선들 중 대다수는 풍력선이었다. 동력선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205㎞에 걸친 휴전선 철조망에 둘러싸인 육지와 달리 바다엔 식별할 만한 경계가 없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부들의 경우, 부지불식간에 남북의 경계선을 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래도 분단 초기엔 남북이 서로 납치한 어부들이 원하면 조기에 송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기 송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한국 해역으로 고속 경비정을 침투시켜 적극적으로 어선을 나포해갔다. 수많은 한국 어선이 1967년부터 197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납북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 무렵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이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육상과 해상 일대에 한국군을 묶어두려 한다고 분석했다. 해상 납치 작전을 통해 한국군이 베트남으로 가지 못하게 방해할 의도였다는 것이다.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는 어선이 늘어나자 박정희 정부는 어로 저지선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어선들을 선단으로 조직한 뒤 해양경찰 소속인 ‘어업 지도선’의 지휘를 받게 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그러자 북한은 어선뿐만 아니라 어업 지도선까지 납치했다. 문제는 북측의 이 같은 적극적 납치 작전에 희생된 한국인들을 한국 정부가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안몰이의 제물로 삼았다는 점이다.

1968년 11월9일, 대검 공안부는 어로 저지선을 넘는 어선과 선원을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하라는 지침을 확정했다. 나아가 해상 군사경계선을 넘는 어부는 모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수사하도록 조치했다. 같은 해 12월25일에는 ‘어로 저지선을 넘어 조업하다가 두 번 이상 납북된 어부에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라’고 산하 검사들에게 지시했다. 이런 방침에 따라 1969년 5월 강원 경찰국은 고성경찰서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려보낸다.

“북한 해상에서 잡혔다고 하자”

“납북귀환 어부 심문 경찰관에 대한 지휘감독으로 간첩 색출에 전력을 경주할 것이며, 간첩을 색출하는 심문관에게는 상당한 보로금(1건당 당시 금액으로 약 15만원)을 지급할 계획인바, 본 취지를 주지시켜 심문에 철저토록 하라.”

납북귀환 어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들에게 어부들 사이에서 간첩을 색출해내라고 상당 규모의 보상금까지 내건 것이다. 납북 어부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행위, 간첩조작을 공안당국이 권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납북귀환 어부들은 대부분 한국 영해에서 조업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 고속 경비정에 납치당한 경우가 많다. 자국 어선을 보호해야 할 해경의 어업 지도선이나 해군 경비정은 근처에 없었다는 것이 납북 어부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해성호 납북귀환 어부인 김춘삼 시민모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어로 한계선이 38도 36분 51초였는데 우리 배는 그 아래인 38도 35분 02초에서 조업하다 납북됐다. 귀환 후 공안당국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법원에 제출할 ‘납북 경위도’를 작성할 때는 마치 군사분계선 위에서 납치된 것처럼 도면을 조작했다.”

1968년 11월1일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서 명태잡이 조업 도중 납북된 월진호 김용운 선장의 증언도 비슷하다. 당시 고성 통일전망대 부근 바다에서 남한 어선 100여 척이 조업을 하던 중 갑자기 북한 경비정이 총을 쏘면서 남하하자 어선들은 혼비백산해 남으로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속도가 느린 월진호는 북한 경비정을 따돌리지 못하고 붙잡혀 납북됐다. 김용운 선장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15세 때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가 납북귀환 어부가 된 김춘삼 시민모임 대표. ⓒ시사IN 조남진

“귀환 후 고성경찰서 조사 과정에서 납치 지점이 한국 해상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수사관은 ‘당신들이 우리 해상에서 납치됐다고 하면 고성경찰서장과 진해 해군사령관이 다친다. 국가에서 그런 분들 양성하려면 돈이 엄청 들어간다. 좋은 말 할 때 북한 해상에서 조업 중 붙잡혔다고 진술하라’고 강요하며 각목으로 구타하더라. 어쩔 수 없이 거짓 진술한 뒤 입도 벙긋 못한 채 수산업법·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0년 8월30일 북방한계선 남방 6마일 해상에서 동료 18명과 함께 납북된 제2남진호 선원 안정호씨도 북한 영해에서 나포된 것으로 거짓 진술을 종용받은 경우다. 다만 거짓으로 진술했더니 풀려났다. 그는 납북 이듬해(1981년) 5월20일 귀환해서 속초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 안씨에 따르면 경찰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유를 받았다. “당신이 한국 해상에서 납치되었다고 하면 북한 경비정이 침투해 들어왔는데 지키지 못했다고 해경과 해군이 징계를 당한다. 북한 해상에서 조업하다 잡혔다고 하자. 선장만 구속시키고 선원들은 풀어주겠다.”

안씨는 경찰의 요구대로 거짓 진술을 하고 풀려났다. 선장과 기관장 두 사람은 북한 영해 조업을 이유로 수산업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다.

조작된 혐의로 기소된 어부들은 법정에서 수사기관의 구타나 고문 등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했다고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판사가 “검사로부터도 고문을 받았나요?”라고 묻는데, 피고인이 “아니요”라고 답하기만 하면,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가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면서 유죄 증거로 채택되는 식이었다. 혹은 판사가 수사관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있나요”라고 물은 후 수사관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면 조사 과정에서 나온 자백(?)을 유죄 증거로 사용했다.

납북귀환 어부들은 억울한 조작간첩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온 뒤에도 대부분 반공법 위반자로 낙인찍혀 취업 및 주거 이전이 제한되었다. 수사기관의 미행 감시 등 사찰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납북귀환 어부와 접촉한 친척이나 친구, 마을 주민들에 대해서도 경찰·보안사·안기부 등 공안 수사기관원들이 동향 파악을 명목으로 수시로 조사했다. 자연히 정상적인 사회관계는 다 파괴됐다. 자녀들은 연좌제로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귀환한 뒤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거나 수산업법 위반 등 비교적 가벼운 혐의로 처벌받은 어부 가운데 상당수가 짧게는 1년, 길게는 20여 년 뒤에 간첩으로 조작되어 곤욕을 치른 것이다. 이러한 간첩조작은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보안사와 경찰 대공팀이 적극 개입했다. 특히 경찰에서는 이근안 같은 고문 기술자들이 간첩조작을 주도했다.

북파공작원 거절하자 ‘간첩 자백하라’

납북 피해자인 김영수씨는 귀환 후 구속돼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1983년경 군에 입대했다. 근무하던 부대로 국군정보사에서 찾아와 북파공작원(HID)이 될 것을 종용했다. 김씨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군에서는 김씨에게 휴가를 줬다. 부대 측은 휴가 종료일 전날 김씨에게 연락해 ‘특별휴가를 3일 더 줄 테니 푹 쉬다 들어오라’고 했다. 김씨는 3일의 ‘특별휴가(?)’를 누리던 중 ‘무단 탈영병’으로 신고되었다. 보안사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 수사를 받았다. 보안사의 요구는 ‘탈영죄를 인정하라’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간첩 행위를 자백하라’며, 당시의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그를 고문했다.

이처럼 보안사가 김영수씨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참고인으로 잡혀갔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바로 다른 납북 어부 김성학씨다(48~51쪽 기사 참조). 김성학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나는 당시 삼척 임원항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군인 9명이 들이닥쳐 내 머리에 일제히 총구를 들이댔다. 서울로 압송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갔다. 그곳 고문실 문을 다 열어놓고 김영수씨와 다른 일행들이 당하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며 2박3일 동안 공포에 떨게 했다. 나에게 ‘김영수가 간첩이 맞다’는 진술을 하라고 강요했다. 당시 보안사의 목적은 ‘김영수 가족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안사에서 간첩으로 조작된 김영수씨는 징역 10년을 살았다. 그의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일가족이 풍비박산 났다. 김영수씨는 출소한 뒤에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숨어 지낸다.”

납북귀환 어부 가운데는 지금도 김영수씨처럼 숨어 사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주로 고립된 섬이나 바닷가에 사는 어부였다. 이런 문제를 듣고 여론에 호소해줄 친지도 없었다.

최근 결성된 ‘동해안 납북귀환어부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은 숨어 지내는 납북 어부와 그들의 가족 찾기를 최우선 사업으로 꼽고 있다. 찾아낸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고, 법원에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이 단체 대표인 김춘삼씨는 “납북귀환 어부는 처음부터 덮어놓고 간첩으로 몰려 평생 인권침해를 당해온 사람들이지만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제 국가는 그 억울한 피해자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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