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은강’을 배경으로 한 두 ‘가난 소설’ 사이, 한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이 출간된 1978년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1454달러였다. 〈곁에 있다는 것〉(김중미)이 집필된 2020년에는 3만1755달러를 기록했다. 국가 통계 속에서 이제 한국인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이 국가 통계는 ‘평균 수치’일 뿐이다. 케이크가 커져도 가져가는 몫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면 가난은 줄어들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이 사라진 자리에 상대적 빈곤이 들어찼다(〈그림 1·2〉 참조).

독재와 산업화 시대가 끝난 뒤 민주주의가 급속히 발전하고 최근엔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들 한다. 한국은 G7 (선진 7개국)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명실공히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번영만을 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후진국형 산업재해로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죽고 있다(〈그림 3〉). 10대 청소년부터 80대 이주노동자까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노동 환경 속에서 떨어지고 끼이고 빠지고 깔리고 불타고 부딪혀 사라지는 목숨들이 매일 꼬박꼬박 우리 앞에 미약한 신호를 보낸다. 보라고, 이것 또한 한국의 모습이라고.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약하고 빈곤한 사람들을 뭉쳐 삶을 지탱시켜주던 공동체는 점차 사라져간다. 조직과 단체는 와해되고 이웃과 가족은 흩어지며 연대와 정은 옅어졌다. 사람들은 홀로 편의점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으며, 홀로 창문 없는 고시원 침대에 누워, 홀로 모텔방에서 갓난아기를 키우며, 가난을 각개전투로 감당해내고 있다(〈그림 4·5〉).

홀로 끌어안은 가난은 점점 ‘나의 잘못’으로 쪼그라들었다. 1990년 한국갤럽이 국민 1500명에게 물었다. “주변을 볼 때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노력 부족 때문에 가난한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노력해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가난한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38%가 전자를, 52%가 후자를 선택했다. 가난의 탓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2017년 한국갤럽이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번에는 37%가 개인의 잘못으로, 40%가 환경(사회)의 잘못으로 가난이 발생한다고 답했다. 둘 사이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 “두 요인 모두 비슷하다”(22%)가 늘어난 점까지 고려하면,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빛은 확실히 더 차가워졌다. 오늘날의 한국은 “스스로 노력이 부족해서” “개인적 책임감이 모자라서” 가난해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그림 6〉).

결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았던 독재와 산업화 시대의 소설 속에서도 노동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그림 7〉). 개인의 불행과 가난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많은 ‘악’들이 사라졌다고 하는 오늘날, 세상은 꼭 나아졌다고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는다(〈그림 8〉). 김중미 작가가 말했듯이 “절망이기 때문에 희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가난을 혐오하는 시대 가난의 ‘곁에 있다는 것’ 기사 참조).” 그 수밖에 없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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