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원민경 변호사는 “수사기관·법원이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11월16일 n번방의 시초가 된 고담방을 운영한 ‘와치맨’ 전 아무개씨에게 법원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수원지방법원 형사9단독 박민 판사는 “엄한 처벌로 이런 유형의 범죄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할 공익상 요청이 매우 크다”라고 밝혔다. 지난 3월 검찰은 전씨에 대해 징역 3년6개월 형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여론의 뭇매를 맞자, 검찰은 법원에 변론 재개 신청을 했다. 보강수사로 영리 목적 성범죄 혐의를 추가했고, 지난 10월 검찰은 징역 10년6개월을 구형했다. 뒤늦게라도 검찰이 의욕적으로 수사하고 재판부가 적극적인 판단을 한 끝에 내려진 중형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성착취대응팀장 원민경 변호사는 사법부가 피해 여성의 억울함과 고통을 이해할 때 당사자들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잘 알고 있다. 피해 여성은 재판 과정에서 치유를 받거나 결과에 따라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원 변호사는 지난 20년간 반(反)성매매 운동에 앞장서며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돕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법률 상담을 해왔다. 11월20일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서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그를 만났다.

‘와치맨’ 전씨는 7년, ‘박사방’ 조주빈은 40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재판부가 국민적 분노를 읽은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공고한 인식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 스스로 변화했다기보다 바뀌어야만 하기 때문에 가까스로 변화했다고 본다. 거기에는 손정우 판결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성착취물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불법 성착취물 20만 개를 유통한 손정우에 대해 법원은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그를 미국으로 송환해 처벌받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법원은 송환을 불허했다. 손씨는 지난 7월 석방되었다). 유사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데 판사가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전에 더 많이 지적하고 국민적 공분을 보냈다면, 손정우에 대한 수사와 법원의 판단도 달랐을 것이다. 검찰은 와치맨 사건 초기에는 수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국민들이 와치맨 사건이 텔레그램을 통한 성착취물 유통의 시초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검찰의 태도가 바뀌었다.

대다수 불법 촬영 범죄는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친다.

불법 촬영 범죄의 경우 유포하지 않음을 이유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하지만 유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 유포 여부가 수사나 재판 단계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불법 촬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불법 촬영물을 소지할 확률도 높다. 피해 당사자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다. 디지털 성범죄는 재유포로 새로운 피해를 낳을 수 있다. 여느 오프라인 범죄와 비교해 결코 경미하다고 볼 수 없다. ‘피해자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느낄지’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있어서는 안 된다. 중립성을 핑계로 수사기관과 법원이 너무 조심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들 조직에서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법원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조직이지, 거리를 둬야 할 조직이 아니다.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드러난 것 외에 불법 촬영 등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해 있다. 근절 방법이 있을까?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처럼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으면, 피해자의 요청만큼 수사력이 집중되지 않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다. 수사 인력을 얼마나 늘려야 모두 처벌할 수 있을까? 결국 성착취물 차단이 관건이다. 현재 인력을 유지하면서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은 범죄자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17년 동안 운영된 소라넷부터 성착취물이 존재했는데,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현재 사태에 이르렀다. 올해 초, n번방 방지법 시행으로 불법 촬영물이나 복제물을 소지하거나 저장·시청한 사람도 모두 처벌받는다. 보는 것 역시 명백한 범죄행위이며 민형사상 큰 처벌이 따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자에게 중형이 선고되면 유사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경각심을 가지고 스스로 불법 저장물을 삭제하는 거다.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에서 피해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재판이 진행 중이어도 현실적으로 피해자가 절차를 이해하고 안내받기가 쉽지 않다. 피고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재판 구조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법 조력이 필요하다. 공대위 피해자 지원 변호인단과 상담소는 현재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 여성 20여 명을 돕는다.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전 과정을 공유한다. 재판의 결과를 파악하고 향후 어떤 조치를 취할지 논의한다. 아울러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도움받을 수 있다.

검찰, 경찰, 여성단체, 변호인 등 여러 단위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지원하기 위해 함께 발 빠르게 대응하는 점이 눈에 띈다.

이전에도 사건이 생길 때마다 공대위를 만들곤 했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많은 회의와 토론을 거치며 대응에 나섰다. 그 정도로 절실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지난 9월 법원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토론회에서는 바람직한 성범죄 재판을 모색했다. 이날 발표한 사람들이 마치 전사 같았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법원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법원 젠더법연구회가 법원 내부에서는 소수 중의 소수인데,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주었기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성범죄 재판을 모니터링한 활동가들도 참여했다. 각자 위치에서 의견을 나누며 인식 수준을 올려가는 거다. 우리가 서로의 지지 기반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시사IN 신선영11월26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는 모습.

형사처벌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정확하고 분명한 가해자 처벌이 피해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피해자가 확인되지 않아도 피해자가 동의했을 것으로 추정되지 않은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면,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것과 같은 처벌을 내려야 한다.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겠지만, 만약 불법 촬영물 소지와 시청이 단기간에 뿌리 뽑아야 할 엄청난 범죄라는 인식이 공유된다면 계도기간을 거쳐 신상을 공개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또 10대 성범죄자는 아동·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낮은 형으로 처벌받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의 연령이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피해자가 법정 대리자인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청구하는 민사재판도 고려해볼 수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안전과 사회정의에 대해 묻는다. 암담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높은 성 구매율과 알선 산업은 전 세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여성의 몸이 성적 욕구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가 남성에게 이식된 게 아닐까.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성평등과 여성 지위 향상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 직장에서 성추행을 당한 상황에서 가해자 처벌이 벌금이나 집행유예에 그친다면 피해자가 직장을 떠날 확률이 높다. 그 전에 차라리 신고를 포기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 〈셀프 혁명〉을 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피해를 회복해냈다. 개인마다 회복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함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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