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산재한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 글·사진 안해룡 (사진가)
  • 2019.08.19

탄광, 철도,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 자본주의를 위해 희생된 불쏘시개였다.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한반도 식민과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1995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규슈 지쿠호(筑豊) 지역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취재하고 있었다. 프리랜서 사진가로 처음 취재한 현장이었다. 글자로만 알았던 강제동원 현장을 눈으로 보고, 강제노동 피해자를 직접 만났다. 묘지, 위령탑, 납골당 그리고 이름도 묘비도 없는 무덤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순직비 또는 위령비 속에서 조선인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당시 기사는 한 월간지에 사진과 함께 발표됐다.

아들의 첫 기사를 한동안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어렵게 꺼낸 첫마디는 마치 넋두리 같았다. “그때는 그랬어. 나도 홋카이도에 끌려갔었거든. 어쩔 수가 없었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제동원의 역사는 교과서나 책이 아닌 나의 가족사였다.

 


실마리는 지난해 4월 찾아왔다.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 기간에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조사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편집한 자료집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출판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 전역에 있는 위령비 중 확인된 160여 곳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적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자료집을 기초로 내가 방문한 지역을 확인하고, 가지 못한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추도비에 새겨진 조선인의 이름은 우리가 기억 저편에 두고 잊어버렸던 시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저 모두 ‘점’으로만 남아 있다. 점으로만 남은 현장을 ‘선’으로 이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손에 자료집을 들고 순직비와 추모비와 위령비를 찾아다녔다. 다시 오키나와로, 규슈로 향했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구마모토, 가고시마, 미야자키, 야마구치, 히로시마, 효고, 오사카, 교토, 아이치, 시즈오카, 지바, 사이타마, 군마, 나가도, 니가타, 아키타까지. 현장만큼이나 문서 자료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추론하는 것도 중요했다. 가능하면 1910~1920년 노동 현장이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찾고 싶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오지에서, 어떤 도구로,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된 자료는 물론,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과거 논문과 기사를 찾아 복사했다. 취재 지역의 도서관이나 자료실에도 소중한 자료가 많았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꼼꼼한 지역조사 자료와 헌신적인 안내 역시 큰 힘이 됐다.

구마가와 계곡 절경을 가르며 달리는 두 량짜리 관광열차 ‘이사부사호(號)’는 하루 네 번 오코바 역에 관광객을 풀어놓는다. 오코바 역은 구마모토현 히토요시 역에서 가고시마현 요시마쓰 역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의 대표 명소다. 낡은 목조건물이 매력적인 무인역이다. 열차 방향을 돌리기 위한 루프선(loop track)이 있고, 급경사에서 높이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그재그 모양으로 선로를 놓은 스위치백(switch-back)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열차 관광의 재미를 더한다. 오코바 역사 안에는 한국어로 된 관광객 메모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아름다운 오코바 역 인근 낡은 추모비

하지만 오코바 역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언덕의 선로 오른쪽 한구석에 낡은 비가 하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철도공사 중 순난병몰자(殉難病没者) 추도기념비’다. 이 구간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회사 하자마구미(間組)가 철도 부설 공사 중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1908년 10월 세운 추도비다. 사망 일자, 출신지, 이름, 연령순으로 새겨놓은 명단 13명 가운데 낯익은 모양의 이름이 보였다.

 


최길남. 한국 경기도 남양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서른셋의 노동자로 1908년 3월16일 오코바 역 주변 공사 현장 사고로 사망했다. 시기를 보면 한일병합이 이뤄지기 2년 전이다.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추도비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주 시점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이미 조선 출신 노동자가 일본 철도 부설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구마모토현 히토요시 역에서 가고시마현 요시마쓰 역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은 군사적 이유로 내륙을 돌아가는 루트로 결정된 노선이다. 1901년 1월 착공한 공사는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09년 개통했다. 처음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중국에서 데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899년 ‘외국인노동자배척법’이 제정되면서 중국 인력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가지마구미(鹿島組, 현 가지마 건설)는 히사쓰 선 중에서도 야타케 터널 등 난공사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가지마구미는 조선 지점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 150명을 고용했는데, 〈일본철도청부업사〉에 따르면 이는 일본 철도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를 최초로 고용한 사례다. 조선인들은 ‘경력자’였다. 가지마구미가 진두지휘해 1901년 8월 착공, 1905년 1월 개통한 경부철도 공사 경험자들이었다.

조선의 철도 공사 경력자들 중 40명이 1907년 10월30일 1진으로 히토요시에 도착했다. 40명으로 시작한 조선인 노동자는 1908년 4월이 되자 500명을 넘어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게 등을 사용한 운반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가지마구미는 조선인 덕분에 이전의 손실을 보전하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저임금으로 혹사시켰다는 방증이었다.

 


오코바 역 구간을 공사하던 하자마구미 역시 가지마구미와 다르지 않다. 하자마구미는 1889년 4월에 설립돼 기타큐슈의 철도 공사를 담당하던 지역 토목회사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발전 기반을 구축했다. 하자마구미는 가지마구미의 지원으로 조선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공사에 참여했다. 관설 공사에 투입된 건 처음이었다. 이후 오코바 역 구간 공사까지 이끌었다. 최길남씨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이었다.

히사쓰 선 부설 공사보다 앞서 조선인 노동자를 도입한 곳은 광산이다. 사가현 니시마쓰우라군에 있는 초자 탄광이 대표적이다. 초자 탄광은 1839년 채굴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선탄 산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 노동자 고용을 결정했다.

1897년 8월2일 인천항을 떠난 조선인 20명이 나가사키 항을 경유해 8월7일 초자 탄광에 도착했다. 8월11일 도착한 37명을 포함해 초자 탄광에 일하러 온 조선인 57명의 평균연령은 25.6세였다. 모두 채탄 경험이 없는 초보자였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조선인 노동자의 입갱률은 매우 높았고, 자연스럽게 채탄 성과도 올랐다. 이후 4회에 걸쳐 조선인 230명이 추가로 초자 탄광에 들어왔다.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와 격리되어 생활했다. 임금은 일본인에 비해 다소 낮은 수준이었지만, 채탄 도구 사용료를 임금에서 공제하는 등 임금을 중간에서 갈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전소, 댐마다 1000명 넘는 조선인이 일해

이처럼 일본 기업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인을 고용해왔다. 위험한 업무에 낮은 임금으로도 사람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탄광과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의 노동력 부족도 심각했다. 특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시즈오카의 경우 발전소 공사로 온 조선인 노동자의 자녀들이 지역 소학교에 100명 넘게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이른바 ‘모집인’이 조선 각지에 잠입한 것도 그즈음이다. 이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모인 농민들은 석탄 운반선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현해탄)을 건넜다. 기타큐슈 항에 도착해 심야를 틈타 옮겨 탄 트럭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렇게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착한 곳은 모집인이 말했던 대공장이 아니었다. 지쿠호 탄광 지역에 살면서 광산 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온 논픽션 작가 우에노 에이신은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과정을 포착했다. 조선인들은 주로 밀항으로 입국했다. 우에노 에이신은 탄광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실어 나른 석탄 운반선을 ‘노예선’이라고 불렀다.

대다수 위령비는 일본 패전 뒤 건립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는 공사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된 위령비나 추모비는 많지 않았다. 건설 당시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던 시미즈 터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조에쓰 선(上越線) 시미즈 터널 부근의 순직비에는 조선인 이름이 없다. 1920년대 조에쓰 선 건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석의 ‘기억’에는 담기지 않았다. 노동 현장이 학살 현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1922년 나가쓰가와(中津川)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본인 감독에 의해 자행된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 역시 추모비나 위령비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령비, 위령탑, 추모비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세워졌다.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와 추모비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총련과 민단으로 분리되었다. 해방 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위령비에서마저 분단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탄광, 철도, 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 자본주의가 근대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완벽하고 값싼 불쏘시개였다. 조선인 이름 그대로, 또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때로는 이름조차 없이 세워진 비석은 조선인의 슬픈 이주사가 지닌 단면을 보여준다. 비문은 자본주의 수탈 역사나 제국주의 침략 역사, 학살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험난하고 열악한 조선인 노동 현장 역시 세월이 흘러 현재는 비경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비문에 적혀 있지 않은, 지워진 죽음은 역사와 공간을 통해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이번 작업은 그 시도였다. 우리는 잊어버린 기억을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