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땀이 빚은 ‘보아’라는 가치
-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 2018.11.16
〈인간극장〉 〈성공시대〉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만날 법한 ‘성실한 전문 직업인의 20년’ 같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가수 보아다.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우린 달라요 갈 수 없는 세계는 없죠’(‘ID: Peace B’)라 노래하며 작은 주먹을 공중으로 당차게 뻗어 올리던 중학생,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며 열도를 호령한 아시아의 별,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 심사위원이자 〈프로듀스 101〉의 ‘국민 프로듀서’ 대표였던 바로 그 말이다.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이라기엔 형태도 성질도 달라 보이는 이 다채로운 활약상은 그 길의 주인공이 보아라는 설명이 덧붙여질 때 비로소 그럴싸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가 지나온 시간이 평탄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 우리가 기억하는 한·일 양국에서의 활약으로 더없이 화려한 나날을 보낸 이후 보아는 어떻게 봐도 전성기를 지난 인기 가수의 전철을 밟는 듯했다. 앨범 판매량은 서서히 줄어갔고, 미디어 노출 횟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야심차게 발표한 싱글 ‘Eat You Up(2008)’이 미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고, 소속사 안팎의 복잡한 사정까지 얽혀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 이즈음에서 보아라는 가수에 대한 업데이트가 멈춘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2018년 지금, 보아를 무대 위에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준 건 그의 직업인으로서 책임감 그리고 성실함이다.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 낯선 언어부터 배워야 했을 때도, 데뷔 후 특유의 탁성을 없애기 위해 다시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을 때도, 운동이 아닌 쉼 없는 연습으로 만들어진 복근이 사라질 날이 없다는 말을 던질 때도, 그 모든 순간의 배경에는 성실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100% 자작곡으로만 채웠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Kiss My Lips(2015)〉가 이 근성 있는 성실의 끝판왕이었다면, 〈WOMAN〉은 다소 여유로워진 자세로 여전히 멋진 무대를 완성해낼 수 있는 데뷔 18년차 가수 보아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을 뽐낸다. 단호한 비트에 맞춰 한 음 한 음을 짚은 목소리가, 무대 위에서 만드는 선 하나하나가 믿음직하다. ‘내면이 강한 멋진 나’ 같은 다소 납작한 수사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그것을 부르는 이가 보아이기 때문이다. 한 치의 의심도 필요 없는, 시간과 땀이 빚은 정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