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여성·노예로 과거에 끌려간다면

  • 장일호 기자
  • 2018.11.17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전부 다 알 필요도 없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이런 책을 만날 때면 괜히 투정을 부리게 된다. 이렇게 좋은 작품과 대단한 작가를 지금까지 몰랐다니. ‘헛살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닐까. 이내 생각을 고쳐본다.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야’라고.

타임슬립은 SF 장르의 클리셰(흔히 쓰이는 소재나 이야기의 흐름)다. 새로울 것 없다는 소리다. 타임슬립물의 주인공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미끄러진다. 주인공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흑인’ ‘여성’이고, 그가 향한 곳이 아직 노예제가 존재하는 미국 남부라면?

소설 〈킨〉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주인공 다나는 이삿짐 정리를 하던 중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잠시 후 메릴랜드 주의 숲속에서 눈을 뜬다. 호수에 빠진 소년을 발견하고 구조하면서도 다나는 자신이 1976년에서 1815년으로 거슬러왔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단순 현기증이나 착시인 줄 알았던 일은 반복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도 점점 길어진다. 결국 다나는 살기 위해 ‘노예의 삶’을 익힌다.

저자는 다나가 경험한 폭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다나가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음의 풍경이 변하는 모습은 약자가 저항 대신 순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드러낸다. 그 덕분에 소설은 ‘야만’을 보여주면서도 증오 위에 서 있지 않는다. 시대와 사람에 대한 애증을 이만큼 강렬하고 우아하게 펼쳐놓는 작품을 나는 이전에 만나본 적 없다.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도 놓치지 말자. 특히 책 말미에 실린 두 편의 자전적 에세이(‘긍정적인 집착’ ‘푸로르 스크리벤디’)는 저자와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