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무장의 기적 같은 승리

  • 김형민(SBS Biz PD)
  • 2018.09.21

645년 당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였다. 그중에서 안시성 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당시 안시성의 성주 이름이 정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그는 골리앗 같은 제국의 군대를 다윗같이 막아섰다.

영화 〈안시성〉이 개봉된다는 얘기 들었지? 645년 벌어진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중, 골리앗 같은 제국의 군대를 다윗같이 막아섰던 작은 성 안시성의 사연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넉넉할 거야. 전쟁이란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악함, 비겁함과 용기, 지혜와 우둔함이 뒤섞여 이루는 사연의 종합판 같은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몇 주간 한국 역사상 기억할 만한 전쟁과 전투,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해. 먼저 안시성 전투부터.

전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뭘까? 그건 명분이야. ‘자유’든 ‘해방’이든 ‘제국의 위엄’이든. 하다못해 2003년 미국이 내세운 것처럼, 이라크에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 27대 왕 영류왕을 죽이고 심지어 시신을 토막 내서 시궁창에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태종은 동산에서 즉각 애도 의식을 올리고 조문 사절을 파견한단다. 즉 “임금을 죽이다니 이건 패륜이다”라는 명분을 만든 거지. 그 외 여러 가지 핑계를 더하여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나섰어.

아빠는 우리 역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 중 하나로 연개소문을 꼽아. 연개소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결국 고구려 멸망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보기 때문이야.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몰살하고 수립한 독재 체제는 당연히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지.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을 노출시켰어. 요동성 등 수나라 백만 대군을 거뜬히 버텨냈던 성이 함락된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지. 백암성 같은 곳에서는 성주 손대음이 은밀히 당에 항복을 청하기까지 했어.  

아빠는 연개소문의 책임이 크다고 봐. 칼 여섯 자루를 차고 사람을 밟고 말에 올랐다는 연개소문의 공포정치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불만과 균열을 불러왔을 테니까. 안시성 성주도 연개소문에게 맞선 사람 중의 하나였어. 당 태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어.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정예병들이다.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이에 막리지가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킬 수 없어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안시성의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안시성이 당나라 군에 포위됐을 때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15만 대군을 출동시켜 안시성 구원에 나섰지. 이 회심의 대반격 작전에서도 안시성과의 합동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안시성과 연개소문의 구원군이 연락을 취했다는 기록도 없지. 고구려 15만 대군은 결국 당나라 군의 계략에 걸려 궤멸되고 말았어. 또 이 군대를 지휘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쉽게 항복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약점을 이용한 방책까지 서슴없이 내놓았다. 역시 연개소문 치하 고구려 내부의 이반 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런데 고연수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집과 가족을 돌보고 아껴서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함락할 수 없습니다.”

안시성은 그렇게 똘똘 뭉쳐 있었고 그 정점에 성주가 있었어. 배신자 손대음의 이름은 중국 기록에 남아 전해지지만 이 성주의 이름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알지 못했어. 천년 뒤에야 ‘양만춘’이라는 출처 모를 이름이 거론될 뿐이야. 왕을 죽이고 고구려 귀족들 태반을 몰살시킨 권력자 연개소문의 공격을 버텨냈던 이 안시성주는 당나라 군의 맹공에 직면하게 돼. 공성전이 반복되고 온갖 공성 기계와 계략이 동원됐지만 안시성은 흔들리지 않았어. 이를 지켜보던 당 태종은 토산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흙으로 산을 쌓아서 성벽보다 높이 만들겠다는 토산 공사는 안시성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을 거야. 부실공사 탓인지 이 토산이 무너져버리는데, 흙은 사태가 나서 쏟아지며 숱한 당나라 군의 목숨을 삼켰다. 이때 안시성 성벽마저 뒤덮어버렸단다. 뜻밖에 맞이한 백척간두의 위기였어. 안시성의 생명줄이던 성벽 일부가 사라졌으니까. 그때 안시성주는 궁즉통(窮則通), 즉 궁하면 통한다는 이치를 극적으로 구현한다. 무너진 성벽 밖으로 뛰쳐나가 토산을 점령하고서 참호를 파고 불을 놓아 이쪽의 요새로 만들어버린 거야. 이후 당나라 군과 고구려 군 사이에는 무시무시한 토산 쟁탈전이 벌어졌어. 안시성 전투의 하이라이트였지. 성벽을 사이에 둔 공성전도 아닌 흙더미 위 혈투에서 고구려 군은 당나라 군의 악에 받친 공격을 끝내 격퇴한다.

안시성주는 응원군이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서 자신과 성 사람들의 힘만으로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군대(당 태종의 군대는 한족만이 아니라 돌궐·철륵 등 북방 민족이 결합한 일종의 연합군이었어)를 막아서는 기적을 이뤄냈어. 이는 이후로 천수백년 동안 한반도 사람들의 자존심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 고려와 조선 사람들은 당 태종이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공식 기록에는 없다)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당 태종의 눈이 빠졌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수나라의 침입을 거뜬히 물리친 고구려가, 비범했을망정 독단적이고 잔인했던 연개소문의 등장 이후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지켜보기 바란다. 또 고립무원의 성에서 세계 제국의 군대를 맞아 무려 석 달이나 싸운 이름 모를 성주의 저력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당나라 군이 돌아갈 때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며, 성주 홀로 성에 올라 작별 인사를 했고 황제는 비단 100필을 내려 치하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어. 당 태종의 관대함을 높이려는 왜곡된 기록이라고도 하지만 아빠는 여기서 안시성주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고 봐.

당 태종이 나타나기만 하면 당나라 말로 욕설을 퍼부었던 안시성 수비군, 그들이 창칼을 내리고 모습을 감춘 건 말머리를 돌린 군대를 새삼 자극하지 않으려는 지혜였을 테니까. 또 성주 혼자 성루에 올라 인사한 것 역시 승자의 자만에 취하지 않고, 물러가는 전쟁의 그림자를 담담하게 배웅할 줄 알았던 무장(武將)의 국량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23년 후인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고구려 땅 곳곳에는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성들이 남아 있었어. 안시성 역시 그중 하나였단다. 고구려 멸망 뒤로도 3년을 버티던 안시성은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에 의해 기어코 무너지고 말았지. 당 태종과 싸웠던 안시성주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의 마지막 소회는 무엇이었을까? 이름 석 자, 말 한마디 제대로 된 기록에 남기지 않은 무장, 그러나 우리 역사상 최대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군 안시성주가 사뭇 궁금해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