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이야기, 끝장내야 할 이야기
- 장일호 기자
- 2018.03.30
〈다른 사람〉을 집어든 날도 그런 밤이었다. 호평이 자자한 책이었지만 읽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표지 뒷면의 추천사를 먼저 살펴봤던 탓이다. 추천사를 훑어보니, “강간당하느니 차라리 강간하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라는 문장이 소설에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문장에 압도당했고, 그 마음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 적의를 이해할 수 있는 무수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1년 가까이 이 책을 눈에 걸리는 곳에 두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끝에 겨우 첫 장을 열 수 있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더는 이 책을 미룰 수 없겠다는 이상한 예감 때문이었다. 마침내 30분이 지나고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으므로.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59쪽)”이 나였으므로. “비슷한 일을 당한 여자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203쪽)” 고민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니까.
소설 속 유리의 일기장은 현실의 미투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가 아님을 증명한다. 데이트 폭력 생존자인 진아는 학내 성폭력 고발자인 이영에게 “여자들의 증언으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를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보고 용기를 내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여자들에 대해(332쪽)”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 일’은 어디서나 벌어진다. 마지막 문장은 마땅히 가해자의 것이다. 끝없는 이야기이자 끝장내야 할 이야기, “이제는 네 차례다”(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