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사관 방문해 이명박 정부에 '시위'

  • 남문희 전문기자
  • 2008.03.11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이 압박 전술을 펴자, 3월15일까지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련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베이징을 방문해 북.중 동맹 강화로 맞서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뉴욕 필하모닉 평양 공연이 끝나면 북·미 관계에 ‘멋진 신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웬걸, 그 뒤끝은 썰렁하다. 2월28일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과는 개인적 유대를 가질 생각이 없다’며 찬물을 끼얹은 데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이튿날 평양에 있는 중국 대사관 방문으로 응수했다. 예정에 없던, 말 그대로 전격 방문이었다.

그가 대사관을 방문한 날, 베이징에서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김계관 부상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힐 차관보가 지난 2월27일에 이어 두 번째 바람을 맞은 것이다. 동남아 순방 도중 기별을 받고 급히 달려온 그로서는 말 그대로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점은 베이징으로 향하던 김계관 부상의 발목을 붙잡고 못 나가게 한 사람이 바로 김정일 위원장이었다는 것이다. 북한 소식통은 “김 위원장이 김 부상에게 나가지 말라고 직접 지시했다”라고 밝혔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중국 대사관으로 가버린 것이다. 마치 배수진을 친 듯한 비장감까지 물씬 풍긴다. 북·미 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뉴욕 필 평양 공연이 결정된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때부터 북·미 양측 사이에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됐다. 핵심은 미국 측 참석자의 범위 문제, 그 중에서도 라이스 장관이 참석할지 말지가 관건이었다. 북한 측은 반드시 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미국은 조건을 내걸었다. 즉 북한이 핵 신고에 대한 미국 안에 동의하면 라이스는 ‘한국과 상관없이 평양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물밑 협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지난해 연말부터 라이스 장관이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고 그 다음 날 평양에서 뉴욕 필 공연을 참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2월15일을 기점으로 라이스 방북 무산

그러나 북·미 간 물밑 협상은 2월 중순께 정점에 달했다가 2월15일 일단 파경을 맞았다. 이날 미국 국무부 숀 매코맥 대변인이 라이스 방북 가능성을 일축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바로 물밑 협상이 깨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 측 협상안이 뭐기에 깨진 것일까. 뉴욕 필 공연 이후 국내외 언론에 미국 측 안이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미 지난 2월 중순 북측에 건네져 한바탕 논의를 거친 것들이다.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플루토늄 추출량에 대해 미국이 그동안 주장한 50kg이 아니라 30kg만 신고해도 좋다는 것과 농축 우라늄 문제 및 시리아로의 핵 확산 문제는 비밀리에 미국에만 설명하면 된다는 것이다.

북측을 배려한 것일 뿐 아니라 미국이 핵 문제 해결에 적극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안이었다. 그런데 북한 태도가 묘했다. 최근 국내 언론은 핵 신고에 대한 북한 태도가, 핵물질은 지금 신고하되, 우라늄 농축 문제는 6자 회담이 열린 뒤 얘기하자는 것과 미국도 테러 지원국 해제와 관련한 의회 동의 절차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최소한 지난 2월 중순까지 최대 쟁점은 이런 기술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 측이 ‘조건부 라이스 방북’을 주장한 데 대해 북측은 ‘선 방북 후 문제 해결’로 팽팽히 맞섰다. 북한은 라이스가 일단 평양에 오면 김정일 위원장이 통 크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평양에 올지 말지부터 결정하라는 뜻이었던 셈이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지난 2000년 올브라이트 장관 방북 때 사전에 합의를 하고 방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약속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던 점을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즉, 진짜 할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 사전에 아무리 약속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스 장관 처지에서는 사전에 확약을 받지 않은 채 평양을 가기에는 무리였던 셈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밀고 당기기가 2월 중순까지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2월15일 미국 국무부 발표로 이어진 것이다. 앞의 소식통은 “이때를 정점으로 뉴욕 필 평양 공연은 사실 김이 빠진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나 도널드 그레그 대사 등은 라이스가 불참함에 따라 대타로 참석하게 된 인물이다. 라이스는 페리에게 ‘부시 행정부 임기 내 북핵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하자’는 대북 메시지를 주며, 평양에서 계속 협상 해줄 것을 당부했다. 페리 옆에는 미국 측 협상팀이 따라붙었고 2월26일 뉴욕 필 공연을 전후해 평양에서 대화가 이뤄졌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측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미국 측 안을 수용하라는 채근에 대해 북한 측은 ‘곧 대답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북한의 이같은 반응은 곧바로 베이징에 체류 중이던 라이스에게 전달됐고, 라이스는 같이 도쿄로 출발할 예정이던 힐 차관보를 베이징에 남게 했다. 그러나 답을 주겠다던 평양은 감감무소식이었고, 할 수 없이 동남아 순방에 나섰던 힐 차관보가 기별을 받고 다시 베이징에 나타났는데도 또다시 바람을 맞혔다.

북한이 왜 갑자기 돌아서게 된 것일까. 북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국이 대외적으로는 성의를 보이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시간을 끌면서 북한이 백기를 들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본다. 테러 지원국 해제에 대해서도 부시 행정부가 얼마든지 먼저 조처를 취할 수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2월27일 있었던 라이스의 중국 방문이 북한의 의심을 증폭했다. 즉 라이스가 중국 측에 ‘가능한 한 모든 영향력을 발휘해 북한을 압박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라이스의 요청을 받은 중국은 뒷구멍으로 북측에 ‘평양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식의 구도인가’라며 베이징행을 거부하며 버티는 김 위원장을 교묘히 자극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도 뭔가 상황을 전복시킬 한 수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바로 대사관 방문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테러 지원국 해제 데드라인으로 알려진 3월15일까지 부시 행정부가 의회 보고서 제출 등 성의 있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자신은 중국으로 북·중 동맹 강화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