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에 한 번씩 하는 스위스 국민투표의 안건이 늘 흥미로운 것만은 아니다. 너무 거시적이라 피부에 와닿지 않는 안건이 있는가 하면 ‘겨우 이것 때문에 투표까지 하나’ 싶을 만큼 사소한 안건도 많다. 하지만 가끔은 개인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내용이 투표장에 등장한다. 오는 11월30일 연방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두 안건 중 하나인 ‘시민복무제(Service Citoyen Initiative)’가 그렇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까지 스위스 남성에게만 부과되어온 군복무 의무를 여성은 물론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에게까지 확대하기 위해 헌법
지난 9월 초, 스위스 연방 경찰은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결정을 한 가지 내렸다. 전국 수배 시스템에서 용의자의 피부색 정보를 삭제하기로 한 것이다. ‘리폴(Ripol)’이라는 이름의 이 내부 수배 시스템에는 경찰이 찾는 범죄 용의자에 대한 여러 정보가 들어 있다. 이름, 사진, 나이, 국적, 키, 눈동자 색깔, 문신 등이다. 얼마 전까지는 ‘백인’ ‘흑인’ 등의 피부색 정보도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9월5일 이후 이 항목이 사라졌다. 겉보기엔 별것 아닌 시스템 업데이트처럼 보이는 이 변화 뒤에는, 그간 스위스 사회에서 꾸준히 지
오는 9월28일 연방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법안 중 하나가 스위스 사회를 달구고 있다. ‘전자신원 증명 및 기타 전자 증명에 관한 연방법(이하 전자신원법)’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E-ID’, 즉 디지털 신분증을 도입하는 내용이다. E-ID는 스마트폰 앱에 저장할 수 있는 정부 공인 디지털 신분증이다. 한국에서 이미 도입된 ‘모바일 신분증’과 비슷하다. E-ID를 이용하면 관공서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공문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온라인으로 은행 계좌도 개설할 수 있다. 삶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드는 이 제도가 왜 스위스에 진작 도
지난 6월 말 유럽 각국의 스포츠 미디어를 도배한 뉴스가 있었다. 스위스 여자 축구 대표팀이 FC 루체른의 U15(15세 이하)팀과 치른 연습경기에서 1-7로 대패했다는 소식이었다. 비공개 경기였지만 U15팀의 한 선수가 이를 촬영해 틱톡에 올리며 알려졌다. 이것은 올해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 유럽선수권대회(유로)의 개최국이 스위스라는 점 때문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독일 일간 〈디벨트(Die Welt)〉는 ‘유럽 챔피언십 개최국, U15에 7-1 패배’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오스트리아의 무가지 〈호이테(Heute)〉는 ‘
2011년 5월, 내가 스위스 취리히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토요일 오후에 동네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상품의 독일어 설명을 사전 찾아가며 더듬더듬 읽고 있는데 매장 직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니 나가달라고 했다. 바깥이 아직 환한데 영업 종료라니, 당황해서 시계를 봤다. 6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다. 급히 계산을 마치고 나와 보니 매장 입구에 토요일 영업이 6시까지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난감했다. 필요한 걸 다 사지도 못한 데다 다음 날인 일요일은 마트가 아예 문을 닫기 때문이었다. 주말이 훨씬 붐비는 한국
4월28일 월요일 낮 12시 33분(현지 시각), 스페인 전역에 전기가 끊기던 순간, 발렌시아 근교의 작은 마을 알무사페스에 거주하는 나의 시어머니 레메 로렌테(74)는 강아지 린다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기온 21℃, 구름이 살짝 끼긴 했어도 화창한 날씨였다. 평일 한낮의 공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몇몇과 놀이터에서 공을 차며 노는 어린아이들뿐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던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리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나와 있었다. 웅성거리며 대화하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넷플릭스의 4부작 시리즈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은 13세 소년이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을 지목해 ‘인셀’이라고 놀린 같은 반 여학생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픽션이지만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를 본 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십 대인 딸과 곧 십 대가 될 아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이들이 이런 일에 엮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소년의 시간〉은 출시 약 3주 만에 전 세계 조회수 1억 회를 넘겼고, 공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넷플릭스 역대 톱 5 시리즈에 들어갔
혼돈의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2010년대 이후 소셜미디어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늘어난 채널만큼 혼란도 커졌다. 유언비어, 괴담, 가짜뉴스, 음모론···. 스토리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복잡한지에 따라 부르는 말은 다르지만 모두 거짓 정보의 한 종류다. 이것의 정점이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들 여겼지만, 대규모 재난이라는 그럴듯한 배경 없이도 사람들은 꾸준히 거짓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선거, 백신, 신기술, 유명인, 사건·사고 등 무엇이든 계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신
얼마 전 스위스 연방법원에서 나온 한 판결 때문에 스위스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스위스 동북부 칸톤(주) 장크트갈렌의 도시 빌(Wil)에 있는 ‘성 카타리나 여자 중등학교(6년제 중·고등학교)’가 종교 중립 및 평등 원칙을 어겼으므로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학교 재단의 종교적 배경, 그리고 여학생만 입학 가능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위헌 소송을 제기한 것은 개인 두 명과 빌 지역 청년녹색당이다. 녹색당을 비롯한 좌파 쪽에서는 드디어 학교가 성차별과 종교적 편파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며 판결을 환영했다. 반면 종교계와 스위스국민당(SVP)
셰익스피어가 1606년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극 〈리어왕〉의 제1막 1장은 리어왕의 신하인 켄트 백작과 글로스터 백작 간의 대화로 시작된다. 글로스터 백작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아내가 낳은 에드거, 다른 하나는 혼외자인 에드먼드다. 켄트에게 아들 에드먼드를 소개하면서 글로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제겐 적법하게 낳은 아들이 하나 있거든요. 이놈보다 한 살 더 많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을 더 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녀석은 불러내기도 전에 세상에 나왔지만, 그래도 이 녀석의 어미는 정말 미인이었지요. 이놈을 만드는 동안
1983년 9월1일 새벽,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을 출발해 한국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기존 항로를 벗어나 옛 소련 영공에 진입했다. 여객기는 사할린 인근 모네론섬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바다로 추락했다. 한국인 105명을 포함해 탑승 인원 269명 전원이 실종된, 국적기 사고 중 지금까지 최다 사망자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미국 출장을 다녀오던 대우전자 부장 박일청씨(당시 39세)가 있었다. 교사이던 아내와 여덟 살, 일곱 살짜리 아들,
12월4일 수요일 오후 3시(현지 시각),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사 내 편의점 신문 가판대. 한 여성이 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 1면 기사를 읽고 있다. “한국 윤 대통령, 계엄령 선포했다가 몇 시간 후 해제”라는 제목의 기사 밑에는 국회 앞에서 군인과 시민이 대치 중인 모습을 찍은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다가가서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70대 스위스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이 여성은 대답 대신 “대체 이게 무슨 소동인가? 대통령이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건가? 앞으로 한국 정치는 어떻게 되는 건가?”라
H의 열두 살짜리 아들은 2022년 취리히에 있는 김나지움(인문계 중고교)에 입학했다. H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좋은 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새로 배우는 과목들이 늘었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라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어 달 뒤 학교 공개수업에 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학생들이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펼쳐놓고 수업을 받는데,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 중 일부가 교사의 설명을 듣지 않고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교실 뒤에 서 있던 학부모들에게는 게임이 진행 중인 스크린이 보였지만 앞에 선 교사는 이를
스위스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정밀한 시계? 알프스 절경?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묻는다면 ‘직접 민주주의 제도’라는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국민 누구나 법안을 발의할 수 있고 그 법안이 투표를 통해 시행될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늑대 사냥 허용 같은 비교적 가벼운 사안에서부터 이민 제한이나 연금개혁 같은 중대 사안에 이르기까지, 스위스 국민은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할 기회를 누린다. 그런데 세계의 찬탄을 받아온 이 시스템이 최근 위기에 처했다. 일시적 위기가 아니다.
2021년 2월의 어느 평일 아침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인근 도시 빈터투어에 있는 아파트에서 32세 여성 M은 19개월 된 막내딸을 돌보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는 방학을 맞아 아빠가 있는 세르비아에 가 있었다. M과 남편은 별거 중이었다. M은 얼마 전까지 남편과 시댁 식구가 있는 세르비아에서 5년간 살았지만 반복되는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와 이혼소송을 냈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을 협박하는 남편에 대한 별도의 고소장도 제출했다. 남편은 세르비아 이주민 가족으로 원래 스위스에 거주
한 달 동안 독일에서 열린 유로 2024(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7월14일 밤(현지 시각)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결승에서 잉글랜드를 2-1로 물리친 스페인은 이로써 유로 역사상 최다 우승국(4회)이 되었다. 이번 유로 2024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페인의 떠오르는 스타 라민 야말이 세운 유로 역사상 최연소 출전과 최연소 득점 기록이다. 야말은 2007년 7월13일생으로, 유로 결승 전날 17세가 되었다. 야말의 최연소 득점 기록이 나온 경기는 4강 프랑스전이다. 골을 넣은 야말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교차시키고 손가
역사는 필연의 산물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의 갈래 중 몇 가지 우연과 의지가 겹쳐 하나의 길로 뻗어 나간다. 과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요즘 인공지능(AI)이라고 하면 챗지피티(ChatGPT)로 상징되는 거대언어모델(LLM) 붐이 우선 떠오르지만, 컴퓨터 과학계에서 오랫동안 AI를 상징해온 것은 체스를 두는 컴퓨터, 즉 ‘체스 엔진’이었다.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곧 AI의 발달을 가늠하는 지표로 쓰였다. 역사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클로드 섀넌이 쓴, ‘체스 경기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
지난해 12월8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공식 명칭 게르니카루모). 춥고 비 내리는 날씨임에도 공립학교 앞 광장인 플라사 데 우니온(Plaza de la Unión)에 시민 수백 명이 모였다.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 검은색 비닐 우비를 입은 주민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선 뒤 앞사람의 우비 뒷부분을 잡아 펼치자 거대한 팔레스타인 국기가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뜻에서 인간 모자이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국기 한쪽 끝에는 대형 현수막이 펼쳐졌다. 피카소의
내가 김나지움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어려서 읽은 아인슈타인 전기에서였다고 기억한다. 소년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대목에서 학교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스위스에 와서 아이를 낳고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면서 다시 대화에 김나지움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더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6학년 때 치르는 김나지움 시험이 그렇게 어렵다더라, 그래서 요샌 다 사교육을 시킨다더라, 그런 얘기들을 두세 살짜리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눴다. 나처럼 이주민이던 그들은 스위스 교육 시스템이 너무 경쟁적이라며 농반진반 그때가
지난 3월2일 토요일 밤, 스위스 취리히 시내 젤나우 지역.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잡은 ‘츠바이테 악트(2. Akt)’, 즉 ‘제2막’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은 여느 때처럼 손님들로 붐볐다. 벽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 7개에서 스포츠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맥주잔을 손에 든 이들이 저마다 자기 팀을 응원했다. 넓은 창문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사람들은 닫힌 창문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 9시35분을 막 지나던 시각, 음식점 안에서 창문 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훤히 보이는 인도에서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