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9반 임세희 학생 아빠 임종호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7] 박미소 기자 2학년 9반 임세희 학생의 아빠 임종호씨(53)는 참사 초기 진도체육관에 여러 달을 머물렀다. 수색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미수습자 가족들과 함께 바지선으로 갔다. 집회에 나가서 캡사이신이 섞인 물대포를 맞고, 길바닥에 누워 죽자 사자 버틸 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자기 학대를 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그 시간을 지나왔다.“처음 진도체육관에는 정말 사람이 많았어요.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모두가 붙어 앉아 있었죠. 현철이 아빠나, 양승진 선생님 가족이 제 옆자리였어요. 계속 못 찾는 거예요. 우리 애 2학년 6반 권순범 학생 누나 김소리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5] 박미소 기자 2학년 6반 권순범 학생의 누나 김소리씨(34)는 표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엄마들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괴로울 때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참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남 일 듣는 것처럼 모른 척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다.“4월이 되면, 집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요. 이맘때쯤이면 노란 현수막이 거리에 많이 걸리죠. 동시에 확성기를 단 차량이 안산 일대를 돌면서 혐오 발언을 크게 틀어놓고 다녀요. 매년 반복이에요. 종종 안산을 떠나고 싶어지죠. 차라리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편할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누나 김송이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3] 박미소 기자 김송이씨(35)는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누나다. 15년 차 타투이스트다. 참사 이후 유가족 여러 분에게 타투를 해준 적 있다. 어떤 어머니의 가슴팍에는 아이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새겨주고, 어떤 형의 팔에는 노란 리본과 가족의 생일을 남겨줬다. 어떤 마음으로 타투를 새기는 건지 그는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며 함께 슬퍼했다.“엄마도 저도, 병원을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서로 몰라요. 남들한테 건너 듣죠. 서로 걱정시키기 싫어서요. 지금까지 동생 이야기는 서로 잘 하지 않아요. 전 엄청 바쁘게 지내 세월호 생존자 화물차 기사 윤길옥씨[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2] 이명익 기자 화물차 운전기사인 윤길옥씨(60)는 제주행 배에 오를 때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는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나마 배에서 잠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화물 기사의 삶은 육지로 오고 가는 삶을 뜻한다. 그는 10년 전 세월호에 올랐던 화물차 기사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하다.“아직도 왼쪽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아요. 두 발의 화상도 이식수술을 계속 해야 하는데 요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3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는데, 오래 하진 못했어요. 다른 일을 좀 하다가 2년 전에 다시 2학년 3반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1] 신선영 기자 ‘기간제 교사’라는 꼬리표는 딸의 죽음 후에도 따라붙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학년 3반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씨(64)는 딸의 순직 인정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다. 각계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으로 ‘김초원·이지혜 교사 순직 인정 대책위원회’를 꾸려 오체투지와 서명운동, 기자회견 등 지난한 활동을 펼쳤다. 참사 발생 3년이 지난 2017년 5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지면서 두 교사의 순직이 인정됐다. 2018년 1월 김초원 교사는 단원고 교사 8명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에 안장됐다.“초원이는 중학교 2학년 “조금 더디더라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박미소 기자 김송이씨(35)는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누나다. 15년 차 타투이스트다. 참사 이후 유가족 여러 분에게 타투를 해준 적 있다. 어떤 어머니의 가슴팍에는 아이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새겨주고, 어떤 형의 팔에는 노란 리본과 가족의 생일을 남겨줬다. 어떤 마음으로 타투를 새기는 건지 그는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며 함께 슬퍼했다.“엄마도 저도, 병원을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서로 몰라요. 남들한테 건너 듣죠. 서로 걱정시키기 싫어서요. 지금까지 동생 이야기는 서로 잘 하지 않아요. 전 엄청 바쁘게 지내 “하고 싶은 거 꼭 하면서 살려고요” 박미소 기자 한혜진씨(26)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민지 학생과 생존자 장애진씨의 중학교 친구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후, 민지씨의 생일이 다가올 때면 애진씨와 함께 민지씨를 만나러 간다.“금요일을 좋아하고 퇴근을 좋아해요. 곧 퇴사하는데, 3·5·8월에 여행을 가요. 제 좌우명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살겠다’는 거예요. 민지 장례식 때, 민지 아버지께서 안아주시면서 ‘너희는 하고 싶은 거 꼭 하면서 자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고민하고, 정말로 그렇게 살아요.사실 가끔씩은 민지를 약간 원망했어요. “세월호 기억 세대를 위해서” 신선영 기자 장순복씨(50)는 준우 이야기를 하면 얼굴빛이 밝아진다. 준우와 함께한 시간은 10년이 지나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씨는 세월호 가족과 일반 시민이 함께하는 4·16합창단에서 2016년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다.“제가 집에서 노래하면 준우가 옆에서 잘 들어줬어요. 참사 이후에는 아이가 없는데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싫었어요. 한동안 엄청 울었죠. 4·16합창단에서 〈너〉 악보를 받았을 때 못 불렀어요. ‘태어나던 날 처음 잡던 손. 목소리를 알아듣던 너. 세 살 적 기차 창에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던 너. (중략) 열넷 “절망으로 시작했지만 희망을 봤어요” 신선영 기자 2014년 9월 정신과 의사 정혜신·심리기획자 이명수 부부의 제안으로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이웃)’이 문을 열었다. 20년 차 시민단체 활동가이던 이영하 전 대표(50)는 유가족이 마음껏 와서 울고, 편하게 밥을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저없이 실무를 맡았다. 2021년 2월, 6년 5개월여 만에 이웃은 문을 닫았다. 실무자에서 대표로, 이웃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그는 1년 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 〈밥은 먹었어요?〉를 펴냈다. 현재는 안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안산 지역 활동가로 굉장히 열심 “행복하게 ‘살자’고 생각하기까지” 박미소 기자 2학년 6반 권순범 학생의 누나 김소리씨(34)는 표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엄마들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괴로울 때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참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남 일 듣는 것처럼 모른 척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다.“4월이 되면, 집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요. 이맘때쯤이면 노란 현수막이 거리에 많이 걸리죠. 동시에 확성기를 단 차량이 안산 일대를 돌면서 혐오 발언을 크게 틀어놓고 다녀요. 매년 반복이에요. 종종 안산을 떠나고 싶어지죠. 차라리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편할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겠습니다” 박미소 기자 304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시민과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모임이다. 2014년 9월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작했다. ‘낭독’회에서 참석자들은 참사와 관련된 글을 소리내어 읽고, 귀로 들으며, 세월호를 기억한다. 낭독‘회’는 한 장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집회처럼 이어져왔다. 저마다 조금씩 차이 나는 기억과 감정을 각자의 내면에 가둬두지 않고 타인들에게 풀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기억과 참사, 그리고 안전에 대한 의미를 매번 새로이 정립한다. 낭독회의 오랜 일꾼인 유현아(53)·권창섭( 2학년 5반 박성호 학생 누나 박보나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0] 박미소 기자 박보나씨(30)는 2학년 5반 박성호 학생의 큰누나다. 201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순례자들에게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2019년 세월호 형제자매들과 함께 간 독일 추모문화기행에서 기억과 추모의 문화를 배웠다. 비방 글 모니터링을 하며 참사 피해자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을 마주하고, 거기에 대응하며 살아왔다. 2014년 4월16일 이전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만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고민할 수 있게 됐다.“참사 초기에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방 글을 모니터링했어요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 이유림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9] 박미소 기자 이유림씨(22)의 가방에는 칠이 벗겨진 세월호 배지가 달려 있다. 2018년부터 달고 다녔다. 이 배지는 중국의 상하이 한인고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동아리에서 기부 목적으로 판매하는 것을 샀다. 큰맘 먹고 일주일 용돈 중 나흘치를 썼다. 그때부터 교복 넥타이에 세월호 배지를 달고 다녔고, 대학생이 된 지금은 가방에 달고 다닌다.“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당시엔, 중국 현지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한국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정확히 기억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거예요. 날씨가 침침하고 비도 오던 날이었어요. 2학년 7반 허재강 학생 엄마 양옥자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8] 박미소 기자 2학년 7반 허재강 학생 엄마 양옥자씨(56)는 4.16기억저장소에서 활동한다. 기억교실을 안내하고, 365일 전시를 이어가는 4.16기억전시관을 관리하고 있다. 요즘은 매일 새벽 3시30분쯤 일어난다. 또 다른 4월이 오고 있음을 그렇게 알아차린다.“저희는 좌절하고 또다시 시작하고, 그걸 반복한 10년이었어요. 우리 가족들은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전국적으로 서명도 받고요, 20일 넘게 도보 행진을 하고, 삼보일배·삭발·단식을 해도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 가족들 입장에서는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임혜림 〈경기신문〉 기자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7] 이명익 기자 〈경기신문〉 임혜림 기자(28)는 수능 대비 인강(인터넷 강의)을 보던 도중 세월호 침몰 소식을 접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3이었기에 단원고 학생들의 일은 더욱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 합격 후 광장으로 나왔고 그의 대학 생활은 세월호 활동과 함께였다. 오랜 시간 곁을 내어주던 세월호 가족들은 그가 신문방송학과 학생보다는 기자로서 현장에 나타나주길 바랐다. 그리고 10년. 약간 돌아왔지만 기자로서 세월호 가족들 앞에 섰다.“수능 수시 모집이 딱 끝나자마자 바로 친구들이랑 갔어요. 학교에선 노란 리본을 2학년 10반 김유민 학생 아버지 김영오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6] 이명익 기자 유민이를 떠나보낸 그해. 아빠 김영오씨(56)는 46일 동안 단식을 했다. 40일 단식으로 병원에 입원하고도 단식을 6일 더 이어갔다. 참사의 진실을 밝혀줄 거라 여겼던 ‘세월호 특별법‘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했지만, 특별법은 정부의 시행령 앞에 무력화됐다. 밝히지 못한 원인, 처벌받지 않은 책임자들. 참사 이후 10년,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말했다. 제2의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건강은 되찾았는데, 예전 같지 않아요. 옛날에는 힘이 센 편이었는데, 단식 끝나고부터 무거운 걸 잘 들지 못해요. 귀농했다가 2학년 3반 김빛나라 학생의 엄마 김정화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3] 박미소 기자 김정화씨(57)는 2학년 3반 김빛나라 학생의 엄마다. ㈔0416단원고가족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뭐든지 나서서 하고 흥이 많아 춤을 잘 추는 사람이었던 김정화씨는 2014년 이후 춤을 춘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딸을 천국에서 만날 날을 위해 예전보다 더 잘 살아가기로 했고, 자신을 다시 찾는 중이다.“이제 겨우 화장을 해요. 이젠 우리 빛나라도 늙어서 짜글짜글한 엄마보다는 좀 더 예쁘고 빛나는 엄마를 원하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인터뷰한다고 하니까, 작은딸이 ‘너무 힘들어 보이지 말고 10년 전보다 잘 살고 있는 모습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 최성림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9] 박미소 기자 중국집 ‘대륙포차’ 사장 최성림씨(41)가 요리할 때 쓰는 모자에는 세월호 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다. 2018년에 목포신항에서 받은 스티커다. 2005년에 중국 옌볜을 떠나 한국으로 온 그는 동포 친구들을 만나러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안산 원곡동을 찾아갔다. 그 길에서 단원고등학교를 알게 됐다.“참사 당시에 TV를 보면서,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아니 어떻게 몇 명도 아니고, 몇백 명이었잖아요. 한국이라는 선진국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다니 믿을 수 없었죠. 특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 되고 화도 많이 났어요. 2학년 4반 권오천 학생의 형 권오현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6] 박미소 기자 권오현씨(38)는 세월호 참사로 막내동생 오천씨를 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다. 참사 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했고, 전국을 돌며 간담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엄마를 생각하며 ‘나라도 정신차려야 한다’고 이 악물고 버텼지만, 2년이 지나자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2016년 겨울,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가 화성학 책을 사고 작곡을 배웠다. 자신의 아픔을 음악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매 순간’이란 곡이 만들어졌다.“어느 날, 저희 가족 다섯 명 모두가 여행을 가는 꿈을 꿨어요.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 시민상주 정기열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5] 박미소 기자 정기열씨(57)는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에서 10년째 활동하고 있다. 이 모임은 2014년 6월에 결성됐다. 3년 후 탈상이 목표였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까지 이어졌다. 광주법원으로 재판을 방청하러 온 유가족들을 위해 법원 앞에서 200여 명이 늘어서 사람띠를 만들었던 ‘진실마중 사람띠 잇기’, 유가족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단원고에서 팽목항, 다시 대전을 향해 걸었던 ‘십자가 순례’를 함께했다. 지금은 금호, 운천 마을에서 매주 월·화요일에 촛불모임을 열고, 3~4개월에 한 번씩 팽목항 부둣가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