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감독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은 ‘변두리 관객’을 겨냥해 만든 영화였다. 그 결과 전체 관객의 4분의 3이 지역 관객이었다.

김상진 감독은 변두리 극장을 좋아한다. 지역권 극장에 가고 싶지만 멀어서 못 간다. 변두리 극장은 지역권 극장과 흡사하다. 김상진 감독은 말한다. “내 영화의 주요 관객은 20세 전후의 고졸 미혼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또 경제적으로 보면 7천원을 내고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매우 중요한 문화 생활인 사람들이다. 그런 관객들을 만나려면 지방이나 서울 변두리로 나가야 한다. 서울 시내에선, 특히 강남에선 그런 서민 관객들을 만날 수 없다.” 김상진 감독은 이런 말도 한다. “강남 사람들은 좀 다른 사람들 같다. 영화를 본다는 게 여러 문화 생활 가운데 하나일 뿐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드는 서민 코미디보단 좀 더 유식한 영화를 좋아한다.” 올해 추석 연휴 동안 김상진 감독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은 전국에서 관객 1백만명을 모았다. 지역 관객의 비중이 서울 관객의 비중보다 유난히 많았다. 4분의 3에 달했다. 김상진 감독의 말대로였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은 ‘전국구 지방 영화’였다.

 

차승재 대표의 영화사 싸이더스FNH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예외 없이 ‘웰메이드’다. 하지만 〈타짜〉를 제외하면 싸이더스FNH의 영화들은 쉽사리 전국에서 4백만명을 넘기질 못한다. 이른바 ‘싸이더스 리미트’다. 지역권 관객들 탓이다. 웰메이드의 기준이 지역이 아니라 서울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 중에서도 변두리보다는 강남에 맞춰져 있어서다.

2003년 싸이더스FNH가 만든 〈싱글즈〉는 도시 미혼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이야기한 쫄깃한 영화였다. 하지만 〈싱글즈〉는 전국에서 2백만명을 겨우 넘겼다. 얼마 전 개봉한 〈미스터 로빈 꼬시기〉는 다니엘 헤니가 나오는 세련된 도시 연애담이었지만 1백만명도 채 넘기지 못했다. 〈싱글즈〉나 〈미스터 로빈 꼬시기〉가 눈독을 들인 관객들은 20대 중·후반의 대졸 여성이었다. 세련되고 유식하고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감독이 불편해하는 바로 그들이었다. 역시나 〈싱글즈〉와 〈미스터 로빈 꼬시기〉는 서울 강남 관객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지역 관객들은 심드렁했다. 두 영화는 ‘서울 영화’였다. 특정 영화에 대해 서울 관객과 지역권 관객이 반응하는 온도 차가 그만큼 크게 난다는 뜻이다.

땅 값만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이제 영화도 ‘강남 영화’와 ‘강북 영화’로 나뉜다. 서울 관객 중에서 강남권 관객과 강북권 관객의 반응에도 온도 차가 있다는 얘기다. 강북 관객과 지역권 관객의 반응은 흡사하다. 영화 문화의 양극화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추석 연휴마다 양극화를 뼈저리게 느낀다. 2005년 추석 연휴에 〈가문의 위기〉가 1등을 할 거라고 자신 있게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경쟁작들이 쟁쟁했다. 허진호 감독의 〈외출〉도 있었다. ‘욘사마’ 배용준과 손예진이 나오는 영화였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도 있었다. 강동원과 하지원이 나왔다. 〈가문의 위기〉는 ‘짝퉁 속편’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지역 관객들의 힘이었다. 그런데 서울권에선 판도가 또 달랐다. 〈외출〉과 〈형사〉가 〈가문의 위기〉와 어깨를 겨뤘다. 〈가문의 위기〉가 챔피언을 먹은 건 관객들이 양극화된 덕이었다.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의 영화 소비에 큰 차이가 진 탓이었다.

7만원짜리 영화와 7천원짜리 영화의 차이

영화 소비의 양극화는 경제적·계층적 양극화가 지리적으로 재현되면서 뚜렷해지고 있다. 잘사는 동네와 못사는 동네가 나뉘면서 지역별로 흥행영화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얘기다. CGV나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같은 멀티플렉스들의 극장별 흥행 순위를 살펴보면 양극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양상은 처음엔 자동차나 아파트 같은 값비싼 물건을 소비할 때만 나타났다. 영화는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앉아서 똑같은 경험을 하는 가장 평등한 서민 오락이었다. 하지만 지역 간, 계층 간 양극화가 깊어지면서 영화에서도 차이가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영화를 보게 됐다.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하게 됐다.

서울 강남CGV엔 ‘씨네 드 세프’라는 특별한 상영관이 있다. 이곳에선 최고급 프랑스 요리를 즐기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한 사람에 7만원이다. 여느 극장에선 7천원이면 볼 수 있는 똑 같은 영화를 7만원을 내고 본다. 그런데도 씨네 드 세프는 언제나 예약이 꽉 차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부유층 인사들도 즐겨 씨네 드 세프를 찾는다. 누구는 7만원짜리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7천원짜리 영화를 본다. 양쪽이 같은 문화적 체험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양극화다.

 

ⓒ시사IN 한향란영화 소비의 양극화는 멀티플렉스들의 극장별 흥행 순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 소비의 양극화는 한국영화의 만듦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객들의 관람 성향에 차이가 있다 보니 더 이상 영화도 전체 관객을 상대하지 않게 됐다. 대신 관객을 나누어 갖는다. 지역별로·계층별로·안성맞춤인 영화를 짜맞춘다. 올해 추석이 그랬다. 〈본 얼티메이텀〉은 서울권 관객을 노렸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은 지역권 관객을 노렸다. 〈두 얼굴의 여친〉은 20대 초반 여성 관객을, 〈사랑〉은 20대 초반 남성 관객을 노렸다. 〈즐거운 인생〉은 30대 이상 직장인이 목표였다. 이제 한국 영화는 다수 대중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싸이더스 리미트를 경험하면서 한국 영화는 더 이상 무턱대고 웰메이드를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눈높이 영화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른바 강남 영화는 한국 영화의 질적 성장을 견인해 왔다. 그러나 강남 영화는 만들면 손해다. 상위 3%를 상대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중문화는 서민 문화다.

 

하지만 서민의 눈높이에만 맞추면 문화는 하향 평준화된다. 양극화는, 또 한국 영화의 문화적인 저력을 망가뜨리고 있다. 영화는 다수 대중의 문화다. 다수 대중이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그로 인해 여론을 주도하게 된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였던 건 그래서였다. 양극화로 관객이 파편화되면서 영화는 모두의 동일한 무의식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일부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게 양극화의 문화적인 폐해다. 영화도 〈화려한 휴가〉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보편화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아닌 이상 더는 다수 대중과 내밀한 교감을 하지 못한다.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양극화를 경험해 왔다.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 몰리도록 조장했고 그들의 부가 계속 편중되도록 방치했다. 서울과 지역권의 경제 격차가 태평양만큼 멀어지는 걸 보고만 있었다. 이젠 대중문화의 차례다. 지금 한국 영화가 그런 양극화에 반응하고 있다. 〈디 워〉 역시 양극화의 결과다. 서울권과 지역권, 그 중에서도 평단과 일반 관객의 파편화는 양쪽이 한 편의 영화를 함께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면 영화는 대중문화라기 보다는 ‘소중 문화’다. 김상진 감독은 말한다. “나 역시, 강남 영화 관객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인연이 없다.” 그의 탓만은 아니다.

기자명 신기주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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