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시작된 땅 아프리카, 무지개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인권의 성지 소웨토에서 월드컵이 시작됐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압도적인 경제를 바탕으로 지구상 가장 큰 축제인 월드컵 개최를 일구었다. 이명박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아공은 ‘글로벌 리딩 국가’ G20 회원국이다. 엄밀히 말해 남아공은 G14(미국·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이탈리아·일본 등 선진 7개국 G7에서 범주를 넓힌)에 속하는 나라다. 한국은 인도네시아·터키·아르헨티나 등과 함께 G20에 속해 있다. 남아공 경제는 아프리카 GDP의 45%를 차지하고, 아프리카 경제 2위인 이집트의 3배 규모다. 백인들이 유럽의 귀족과 다를 바 없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해서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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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은 불편하고 치안은 불안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월드컵을 개최할 수준은 아니었다. 최상과 최악이 충돌하면서 공공 인프라는 평균 이하로 떨어졌다. 경기장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월드컵 개막 당일인 6월11일에도 개막전이 열리는 요하네스버그 도로 곳곳은 공사 중이었다.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 주변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길버트 씨(34)는 “월드컵도 좋지만 먹고사는 것이 문제다. 일을 빨리 끝내면 그만큼 직장을 빨리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공사 진척이 더디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이전에 공사를 끝내기 위해 정부는 근로자들에게 월드컵 티켓 두 장을 지급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 앞에 당근은 별 효과가 없었다. 개막에 맞춰 경기장을 완공한 일이 대견할 지경이다.

교통은 이번 월드컵의 가장 큰 두통거리다. 6월10일 만델라 전 대통령의 증손녀 제나니 만델라(13)는 소웨토 올랜도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전야제를 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교통체증은 심각했다. 특히 정전이 될 경우 체증은 대책이 없다(기자가 요하네스버그에 머무른 5일 동안 정전을 두 번 경험했다. 남아공에서는 전선을 잘라 파는 도둑이 활개를 치고 있다).

개막을 사흘 앞두고서야 공항과 요하네스버그 시내를 연결하는 전철이 개통됐다. 하지만 아직 보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주요 도로에 크고 화려한 버스정류장이 생겼지만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관광 안내원 시포 씨(45)는 “운송 사업을 장악하는 택시 회사들이 버스 운행을 막고 있다”라고 말했다. 남아공에는 대중교통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 관광객들은 운전사가 딸린 차를 빌려야 한다. 따라서 남아공 여행 경비는 유럽이나 미국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치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쁜 편에 속한다. 남아공에서 살인은 30분, 강간은 3분 그리고 가택 절도는 1분에 한 번꼴로 일어나고 있다. 2001년에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의 부인 마리케 씨가 집에서 살해당하기도 했다. 남아공에서 강도를 만난 것은 뉴스가 안 된다. 그나마 기자들이 강도를 당하는 게 기사화될 뿐이다. 다른 나라 기자를 만나면 자국 기자들이 털린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온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 시절 경찰은 오직 흑인을 증오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진짜 범죄자를 잡을 능력이 없다. 요하네스버그 만델라브리지에서 만난 한 경찰관은 “범죄를 저지르고 타운십에 들어가면 사실상 범인을 잡기 어렵다. 몸집이 뚱뚱해 달리기를 못하는 경찰도 부지기수다”라고 말했다.

 

 

 

ⓒReuter=Newsis중무장한 남아공 경찰들이 그리스 국가대표팀 버스 앞에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남아공 정부가 월드컵에서 취한 획기적인 치안정책은 범죄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아공에는 왜 갔어?〉 저자 조현경씨는 “끼니를 못 잇는 흑인 강도들이 월드컵을 따지고 관광객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컴퓨터 시스템 회사인 ‘후웨이’ 남아공 지사에서 근무하는 진취엔 씨는 “강도를 만나면 무조건 200달러를 줘라. 그것이 남아공에서의 당신 몸값이다”라고 말했다. 외출할 때마다 여러 주머니에 돈과 신용카드를 나누어 넣고, 비상금을 다른 주머니에 챙겨야 했다. 그리고 200달러를 준비했다. 만약에 대비해 손등에 비상연락처를 적었다.

교통은 불편하고 치안은 불안하지만 월드컵 그리고 축구에 대한 남아공의 열정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지난 5월9일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우리는 단지 운동시설을 준비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준비를 마쳤고, 심리적으로 최상의 상태에 있다”라고 말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제프 블래터 회장은 “남아공 월드컵이 역사상 최고의 월드컵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역대 최고 월드컵 될 것”

아프리카는 아름다운 축구를 한 역사와 전통이 있다. 1970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내전 때 펠레가 속한 산토스 팀이 방문하자,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반정부군은 3일 동안 전쟁 중단을 선언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전쟁을 속개해 상대를 향해 치열하게 총알을 날렸다.

남아공 남단의 케이프타운에서 10km 떨어진 감옥 로벤섬.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27년의 수감생활 중 17년을 보낸 로벤섬에서 남아공 운동권은 축구를 통해 화합하고 저항했다. 수감자들은 3년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1967년 12월 어느 토요일 30분 동안 축구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수감자들은 단순히 축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축구협회를 만들고, FIFA 규정에 따라 리그를 운영해 나갔다. 놀랍게도 로벤섬 축구 주역들이 남아공의 대들보가 됐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레인저스 FC의 주장이었다. 국토부 장관 겸 월드컵 조직위원인 토쿄 섹스웰레와 헌법재판소 부소장인 딕강 모세네케도 로벤섬 출신이다,

 

 

 

 

1995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왼쪽)이 럭비 월드컵에서 우승한 럭비 대표팀 주장 프랑수아 피에나르를 격려하고 있다.

 

로벤섬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지금은 로벤섬 안내원으로 일하는 왈터 라이번 씨는 “로벤섬의 축구는 단순히 축구가 아니라 정치활동이자 저항운동이었다. 남아공에서 축구는 자유와 민주주의이고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근거지였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개막이 다가오자 남아공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과 환희에 휩싸여 있다. 지난 5월9일 낮 12시 요하네스버그 중심가 샌턴 지역에서 남아공대표팀 선수단 ‘바파나바파나’의 출정식이 있었다. 남아공 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표팀의 행운을 빌었다. 요하네스버그·프리토리아·케이프타운·더반 등 다른 도시와 시골에서도 수십만 인파가 부부젤라(피리의 일종)를 불고 남아공 국기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했다.

요하네스버그 근교 이스트랜드 쇼핑몰에서 부부젤라를 불던 음포 씨는 “얼마 전까지도 준비가 미흡해 월드컵 개최지가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남아공 사람들이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월드컵이 개최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멕시코에서 온 에르난데스 씨(48)는 “남아공에 상고마(주술사)가 많아서 멕시코 팀에 내가 직접 용기를 주러 왔다. 그런데 거리마다 숍마다 넘쳐나는 남아공 팬들의 응원 에너지가 더 문제다. 남아공 팬은 세계 최고다”라고 말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운 곳은 월드컵 개막식과 결승전이 열리는 ‘사커시티’가 위치한 소웨토(Soweto). 소웨토는 요하네스버그의 남서쪽 타운십(South West Townships·흑인 집단 거주지)의 약자다. 타운 20여 개가 몰려 있는 소웨토는 남아공 최대 규모의 타운십이다. 요하네스버그 전체 인구 920만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0만명이 소웨토에 산다.

20세기 초 남아공 정부가 백인들의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쫓아낸 흑인이 하나둘 모여 살던 소웨토는 버려진 땅이었다. 폭력·강간·살인이 일어나는 쓰레기장이었다. 국가 간, 부족 간, 파벌 간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를 찌르고 불태워 죽이는 곳이었다. 밀고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타이어를 목에 끼운 채 불을 붙여 죽이는 ‘목걸이 교수형’이 집행되던 곳이었다. 지난해에는 짐바브웨·모잠비크·나이지리아에서 온 불법 이민자 10여 명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흑인들에게 소웨토는 ‘타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티 오브 조이〉의 원작가 도미니크 라피에르는 “소웨토는 이 땅에서 지옥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Reuter=Newsis6월9일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바파나바파나(남아공 축구대표팀 별칭)를 찾아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동네에 있는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갈 능력이 있는 소웨토 사람은 거의 없다. 1만원짜리 대표팀 유니폼은커녕 3000원짜리 부부젤라나 1000원짜리 국기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이들이 절대다수다. 하지만 소웨토 사람들은 이미 월드컵 준비를 마쳤다. 소웨토 사람들의 열정만은 월드컵 우승감이었다.

소웨토 졸라 구역 밴디래 스트리트. 범죄율이 높아 현지 흑인들도 들어가기 꺼리는 지역이라고 한다. 6월9일 졸라 구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축구를 하거나, 부부젤라를 불거나, 국기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축구공은 물론 깡통·오렌지·나무 등 찰 만한 것은 무조건 차고 놀았다. 줄루족 출신 졸 씨(47)는 “백인들은 우리 땅을 빼앗고 성경과 축구를 주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아이들이 즐겁게 지내는 것은 축구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 널리 알려진 속담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를 빗댄 표현이었다. 졸 씨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준 만델라와 흑인 정권에 감사한다. 백인 정권이었으면 월드컵은 어림없다”라고 말했다.

돈을 탐내고 달려든 사람은 경찰뿐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레지날드 자마 씨(28)는 가족·친구들과 함께 소웨토 공원에서 길거리 응원을 하기로 했다. 자마 씨는 “남아공 대표팀이 4강에 갈 것 같다. 못 가도 상관없다.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소웨토 공원에 나가서 즐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마 씨의 언니 패트리샤 씨(35)는 “월드컵은 인생에 한 번 오는 축제다. 미안하지만 이 파티 기간에는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패트리샤 씨는 거리 응원을 할 바파나바파나 유니폼과 깃발 그리고 부부젤라를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축구선수가 꿈인 아들 심피위(13)에게 축구공을 사줄 형편은 못 된다고 했다.

 

 

 

 

ⓒ시사IN 주진우요하네스버그 거리는 부부젤라(피리의 일종)를 불고 남아공 국기를 흔들며 춤추는 시민으로 넘쳐난다.

 


6월10일 월드컵 전야제가 열린 소웨토 올랜도 구역.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은 ‘카메룬의 흑표범’ 사무엘 에토처럼 공을 다리에 달고 달렸다. 축구를 함께 하면 누구나 친구가 됐다. 공을 차는 아이들 거의 전부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얀디(12)는 “하루에 세 시간을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연습한다. 우리 반의 절반 이상이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이얀디는 축구화를 갖는 게 소원이다. 올랜도 경기장 앞에서 만난 전직 축구선수 빅터 씨(35)는 “10년 가까이 직업이 없고 배고프고 걱정이 많다. 하지만 월드컵은 나 같은 처지의 흑인들과 아이들에게 걱정을 잊게 해준다”라고 말했다.

소웨토에 드나든 사흘 동안 돈을 탐내고 달려든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은 소웨토 곳곳에서 돈을 원하는 검문·검색을 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기자에게 “밥을 못 먹었다. 배가 고프다”라고 말했다.

“Black is beautiful”

월드컵은 아프리카 시대의 문을 열어젖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아프리카의 능력을, 아파르트헤이트를 극복한 남아공의 저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장이다. 무엇보다 월드컵은 흑백 화합을 위한 가교가 될 것이다. JAG스포츠&교육 재단 책임활동가 송고 씨는 “남아공에서 스포츠는 피부 색깔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었다. 만약 남아공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인종을 떠나 하나가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남아공 국민 모두가 길거리에서 승리를 축하했던 럭비 월드컵 때처럼 말이다”라고 말했다. 케이프타운 외곽의 타운십 ‘카야만디’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심샛별씨는 “월드컵을 계기로 남아공 전반에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럭비와 크리켓만 하던 백인 학교에 축구팀이 생기기 시작했다. 럭비에 열광하던 백인들이 흑인들과 함께 월드컵을 즐기는 것이 놀랍고 충격적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주진우흑인 집단 거주지역인 소웨토에 사는 가난한 소년들이 미래의 국가대표를 꿈꾸며 축구를 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9개 부족의 전통 의상을 입은 무용수 1500여 명이 춤을 추는 식전 행사를 시작으로 2010 남아공 월드컵 잔치는 시작됐다. 경기장 밖에서는 4900만 남아공 사람들이 두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리는 ‘토이토이 춤’을 함께 추었다. 검은 대륙의 53개 국가 국민 10억명이 추는 아프리카의 춤은 시작됐다. “Black is beautiful.”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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