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돌아보면 뭐가 떠올라?” “방. 그동안 이사 다녔던 방들이 떠올라.” 김미월의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민음사)에서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이다. 20대 시절에 살았던 방을 하나씩 찾아가 둘러보며 작품을 구상했다는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춘의 계단을 밟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조금씩 좁아지고 낮아지고 어두워졌던 방들. 문이 잘 닫히지 않던 방, 저녁마다 서향으로 난 창에 노을이 번지던 방, 장마 때면 침대 다리가 물에 잠기던 방, 정전이 잦던 방, 그가 들어오고 싶어했던 방, 방, 방들. 그 많은 방에 나는 내 20대를 골고루 부려놓았다.”

20대에게 방은 단순한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서 벗어났다는 ‘독립’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시시때때로 옮겨 다녀야 하는 그들의 방은 20대의 ‘불확실성’을 암시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너무 낮거나 높거나 덥거나 추운 곳에 자리 잡은 그들의 방은 20대의 ‘가난’을, 그 작은 공간 안에 화장실과 싱크대, 신발장까지 욱여넣고 디지털 도어록으로 밀봉해버린 그들의 방은 잘 뭉치지 않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20대의 ‘고립’을 보여준다(〈시사IN〉 제57호 특집 기사 ‘방살이하는 청춘들’ 참조).

ⓒ꿈꾸는 슬리퍼 제공‘꿈꾸는 슬리퍼’라는 성공회대 노숙 모임의 학생들이 텐트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대안 공간’을 고민한다.
20대가 자신이 겪고 있는 불확실성과 가난·고립의 감정들을 ‘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형상화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주로 문학이나 영화를 통한 감성적 접근이 많았다.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집 〈침이 고인다〉(2007)에서는 고시원과 반지하방, 4인용 독서실 같은 방에서 제도권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잔혹한 ‘유예’의 시간을 감내하는 숱한 청춘이 등장하고, 김미월의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2010)에서는 스무 살 주인공이 여러 방을 거치며 서른 살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졌다.

지난해와 올해에는 20대의 방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편 〈자기만의 방〉(2010)과 〈방, 있어요?〉(2009)가 만들어졌다. 영상에는 끊임없이 ‘재개발’하는 도시 속에 끊임없이 ‘자기 계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20대의 모습이 그들이 사는 방과 함께 담겨 있다. 〈방, 있어요?〉를 찍은 석보경 감독은 “처음에는 ‘20대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방’이라는 공간으로 수렴되더라”고 말했다. 두 영화에는 모두 ‘어떻게 하자’는 답이 없다. 〈자기만의 방〉의 심민경 감독은 “방에 누워 있으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 이것을 서로 고백하고 바라보며 공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고백과 공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5월5일 이 영화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 자리에서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는 “보고 나서 술이 당기는 다큐보다는 돌이라도 들고 싶어지는 다큐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20대 주거 문제는 그것을 방치하는 정부와 대학의 책임이 큰데, 도대체 당신들은 왜 그들과 싸우지 않는가?”

ⓒ시사IN 변진경좁은 공간 안에 모든 것을 갖춘 20대의 방은 ‘독립’의 상징인 동시에 ‘고립’을 보여준다.
방을 두고 싸우는 것, 이른바 ‘20대 주거권 운동’이 아예 없지는 않다. 2010청년유권자행동과 대학생유권자연대 ‘2U’가 6·2 지방선거 후보들에게 제안한 10대 정책·공약 가운데에는 “반값 기숙사를 짓게 하라”는 요구도 들어 있었다. ‘자취방 저금리 대출’을 선거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던 연세대 47대 총학생회는 지방선거에 출마한 서울시장·서대문구청장 후보들에게 신촌 인근에 20대를 위한 싸고 질 좋은 임대주택을 짓자는 ‘20대 임대주택안’을 제안할 계획이다. 진보신당은 35세 미만의 단독 가구주에게도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며 집단 민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의 ‘가난’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성공회대 노숙 모임-꿈꾸는 슬리퍼(Slee per)’도 세상에 20대의 방 문제를 던지는 집단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4월 마지막 주부터 매주 수요일·목요일에 열리는 이 모임에서,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 텐트를 친 채 그 안에서 밥먹고 잠자고 영화 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집과 학교가 멀어 방을 구하려다가 그 가격에 놀라 ‘20대의 공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정훈씨(29)가 이 모임을 제안했다. 그는 모임의 성격을 알리는 벽보에 이렇게 썼다. “왜 난 방을 가질 수 없지? 난 가난한 건가? 가만, 이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 우리들의 가난을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공간(방)이 있다면 좋겠다. 가난해서 소외되는 공간이 아니라,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대안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사IN 백승기5월5일 서울 동교동 ‘두리반’에서 20대의 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위)가 열렸다.
하지만 이들은 주거권 ‘운동’에는 조금 비껴갔다. 그렇게 새로운 방을 만들고 또래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꿈꾸는 슬리퍼’는 자신들의 행동이 ‘농성’이나 ‘운동’으로 비치지 않기를 희망했다. “20대의 방 문제에 대해 너무 문화적·감성적으로만 접근하면 제3자적 평론만 남게 된다”라고 염려한 노회찬 대표의 말처럼, 전략적인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20대는 일단 ‘내 방’ 얘기를 하고 ‘네 방’ 얘기를 듣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려 했다. 그렇게 해야 꽉 닫힌 방문이 조금씩 열린다고 믿고 있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