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검찰의 BBK 주가조작 수사 발표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촛불 집회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탄핵 때만큼 열기가 뜨겁지는 않았다.

이명박 최악의 날, ‘트리플 위칭 데이(세 마녀가 춤추는 날)’는 결국 오지 않았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고, 이에 따라 박근혜 전 대표가 지지를 철회하고, 범여권은 단일화에 성공해 대선 구도가 1강2중 구도에서 3각 구도로 재편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이명박 대세론’을 위협하기에는 BBK의 마법이 너무나 미미했다. BBK 수사 결과 발표에서 검찰로부터 아무 혐의 없다는 면죄부를 얻은 이명박 후보는 전리품을 하나씩 챙겼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대통합민주신당 강길부 의원도 지지 선언을 했다.

참여정부 출신인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도 “이번 대선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기업경영의 성공 경험이 있는 CEO 출신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라며 사실상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사 결과 발표 전에 지지 선언을 했던 정몽준 의원을 비롯해, 연예인 등 각종 사회단체의 지지 선언이 줄을 이었다.

반면 범여권은 ‘예고된 참사’를 감당해야 했다. 검찰 발표는 12월6일 수요일에 있었지만 이미 월요일부터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이명박 후보에게 별다른 혐의가 없는 것으로 수사 결과가 발표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명박 캠프에서는 표정 관리에 들어갔고 정동영 캠프에서는 참담한 심정으로 수사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수사 결과 발표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조금 빗나갔다. 이명박 후보에게 단 한 점도 혐의가 없다는 ‘싹쓸이’ 결과가 나올 줄은 이명박 캠프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날 캠프 핵심 관계자들이 각 언론사 선임 출입기자들과 가진 만찬 자리에서 한 캠프 관계자가 “검찰이 너무했다. 10% 정도는 우리에게 불리한 것도 나왔어야 했다”라고 농을 칠 정도였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수사 결과 발표를 지켜보았던 다른 후보들이 붙잡은 지푸라기는 ‘검찰이 이명박 후보 이름을 빼면 구형량을 줄여주겠다는 제의를 했다’는 김경준씨의 필담 메모였다. 이 메모를 빌미로 후보들은 검찰의 편파 수사를 비난하는 촛불 집회를 세종로 사거리(정동영·이회창)와 종각(권영길), 명동(문국현)에서 각각 열고 ‘정치 검찰’을 비난했다.

‘촛불 집회’를 마치고 정동영 캠프 핵심 참모들은 밤늦게까지 긴급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검찰 수사 발표를 차근차근 복기해 보았다. “검찰이 이명박 눈치만 보고 저렇게 완벽하게 면죄부를 주는 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검찰이 비난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도 만들지 않고 왜 이명박 후보가 혐의 없다는 결론을 저처럼 자신 있게 내릴 수 있었을까”가 주된 의문이었다.

검찰의 '편파 수사' 배후로 청와대 지목돼

결론은 청와대였다. 검찰이 이명박 후보 눈치만 본 것이 아니라 청와대로부터 언질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마침 이날 한 인터넷 언론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ㄱ대 출신 ㅅ씨와 이명박 후보 측근 ㄱ대 출신 ㅈ의원이 12월2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다’는 보도가 나온 터라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청와대가 당선이 유력한 이명박 후보로부터 삼성 특검에 대한 양해를 받고 대신 BBK 수사를 봐준 것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삼성 비자금 특검’의 처리와 관련해 청와대는 일찌감치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이 특검 수사 내용에 포함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명한 상태였다. 수사가 진행될 경우 유무죄를 떠나 노 대통령 측근이 줄줄이 소환되는 사퇴가 벌어질 공산이 크고 이는 친노 세력의 정치적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특검 법안에 합의해준 여당 지도부를 청와대 참모들은 강하게 성토해왔다.

 

ⓒ연합뉴스이회창 캠프의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가 삼성 특검과 BBK 수사를 ‘빅딜’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청와대를 의심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대통령 참모들의 정동영 후보에 대한 태도였다. 정동영 후보의 한 측근 의원은 “청와대가 정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다. ‘BBK를 주면 받아먹을 수 있기는 하나. 이회창이 받아먹는 것 아닌가’라고 말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와 검찰은 ‘BBK 마법’에 빠진 이명박 후보를 구해주고 대신 이 후보는 당선될 경우 ‘삼성 특검’에 발목이 잡힌 노 대통령 측과 검찰 삼성을 봐주는 묘수가 바로 BBK 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심증은 갔지만 물증이 없었다.

범여권이 청와대를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선을 고작 2주 앞두고 ‘적전 분열’을 보이는 것이 대선 구도에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전 대표를 품고 가야 하듯, 정동영 후보도 노무현 대통령을 품고 가야 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장관을 비롯해 많은 친노 인사들이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은 자해행위일 뿐이었다.

다음 날 정동영 후보는 ‘거대한 음모’라고 검찰 수사를 비난했다. “수구 부패 정치세력과 일부 수구 언론 그리고 특정 재벌의 수구 부패 동맹이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검찰은 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수구 부패 동맹의 편짜기에 가담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후보의 공격이 청와대를 향하지는 않았다.

 

ⓒ뉴시스이회창 캠프의 강삼재 전략기획팀장.

정 후보 측 민병두 전략기획본부장은 ‘거대한 음모’를 이렇게 풀어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검찰 그리고 삼성 사이에 거대한 딜이 있었을 것이다. 검찰이 조직 보존의 필요성 때문에 이 후보의 편을 들어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민 의원도 ‘음모의 축’으로 청와대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에게서 자유로운 이회창 후보 쪽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강삼재 입 열자 정동영 캠프도 청와대 공격

제대로 운을 뗀 사람은 이회창 캠프의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이번 수사 결과는 ‘노명박(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의 작품이다”라며 노 대통령과 이 후보의 빅딜설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회창 캠프는 ‘양측 핵심 인사가 골프를 치면서 조율하는가 하면, 12월2일 일종의 ‘딜’을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계속 의혹을 키웠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던 정동영 캠프에서는 이회창 캠프에서 먼저 치고 나오자 이를 대뜸 받아들였다. 후보 홍보를 위해 발송하는 12월6일자 ‘정동영 통신’에서 ‘시선 끄는 이명박 후보-참여정부 빅딜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강삼재 팀장의 의혹 제기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캠프에서 청와대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정 의원의 한 측근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 한번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캠프에서 청와대를 공격한 것에 대해 친노 의원들은 발끈했다. 한 친노 의원은 “이러면 판을 깨자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캠프가 너무 경솔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2월6일 과거사관련위원회 9개 기관 관계자와 오찬을 갖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뭐라 검찰에 대고 말하는 것이 계속 5년 내내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라며 빅딜설을 우회적으로 반박했다.

한 친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후보 측과 ‘더러운 거래’를 했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며 2003년 인수위 시절 이야기를 거론했다. 그는 “당시 김각영 검찰총장의 측근이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 나와 있었다. 그가 물의를 일으켜 검찰에 되돌려 보냈는데 김 총장이 이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SK그룹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시작했다. 사실상 대통령을 압박하는 수사였다”라고 말했다.

당시 검찰의 압수 수색은 2월17일 이뤄졌다. 2월10일 노무현 당선자가 손길승(SK그룹 회장) 전경련 신임 회장을 만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이 의원은 “당시 검찰의 압수 수색은 인수위에 전혀 알리지 않고 이뤄진 것이었다. 인수위에서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김 총장이 임기를 보장받기 위해 시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라고 말했다. 이를 근거로 이 의원은 이번 검찰의 수사 발표가 ‘이 후보에게 줄 서기 위한 또다른 정치검찰의 면모’라고 주장했다.

사연이 어찌되었건 이제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검찰은 이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다른 후보 진영에서는 검찰이 회유와 협박으로 수사 결과를 왜곡했다며 공격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정동영 후보 캠프와 이회창 후보 캠프는 함께 촛불 시위를 했고 함께 김경준씨도 접견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12월19일이면 알 수 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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