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9월7일 대법원에서 LG텔레콤 상대 특허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서오텔레콤 김성수 사장.
중소기업이 재벌을 상대로 거래하다 억울한 피해를 당해도 70% 이상이 후환이 두려워 묻어두고 지나가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파산 후 길거리에 나앉아 끝까지 버티는 중소기업 사장들도 더러 있지만 이런 싸움은 대부분 막강한 힘과 두꺼운 보호막을 가진 재벌의 승리로 끝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같은 ‘재벌 절대권력 시대’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9월7일 대법원 특별2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중소기업 서오텔레콤이 엘지텔레콤을 상대로 낸 특허 소송에서 서오텔레콤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 판결은 두 가지로, 하나는 서오텔레콤의 특허 기술을 인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술을 없애버리기 위해 엘지가 제기한 특허 무효 소송을 기각한 것이다. 김 사장이 사업장 건물까지 날려가며 4년간 끈질기게 싸운 결과였다.

20여 년간 기술 하나로 기업을 이끌어온 정보통신 분야 전문 벤처기업가인 김성수 서오텔레콤 사장이 거대 재벌 엘지와 악연을 맺은 때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사장은 위급한 상황에서 휴대전화에 장착한 비상 버튼을 몇 초만 누르면 미리 입력된 긴급 연락처로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이른바 ‘이머전시 콜’ 개념을 최초로 고안한 뒤 14가지 핵심 기술에 대해 특허를 출원했다. 이어서 엘지측과 만나 기술 사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자료 제출 요청을 받고 기술 관련 자료 일체를 넘겨줬다.

서오텔레콤의 기술특허가 등록된 뒤까지도 자료만 챙겨간 채 별다른 반응이 없던 엘지텔레콤에서는 2004년 초 느닷없이 이 기술을 활용한 ‘알라딘’ 폰을 출시한 뒤 언론에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했다. 뒤늦게야 엘지가 자사의 기술을 강탈해갔다고 여긴 김성수 사장은 지리한 법정 투쟁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엘지텔레콤측은 알라딘 판매를 중단했다. 그러나 특허 법정에서 엘지는 서오텔레콤의 기술을 훔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며 이 기술에 별다른 진보성도 없다고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결국 골리앗 엘지를 상대로 한 다윗 서오의 4년에 걸친 특허분쟁에서 이번에 대법원은 ‘서오 쪽 특허의 진보성을 부정한 것은 발명의 진보성에 대한 법리 오해’라고 판시해 김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로 서오텔레콤은 엘지에 권리를 침해당한 12개의 특허기술을 원상회복했다. 이에 대해 엘지텔레콤측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이 서오텔레콤의 특허를 인정해준 것은 맞지만 우리가 그 특허 기술을 도용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성수 사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 특허를 가져가 못 쓰게 하고 짓밟아버리는 것은 한화그룹 총수의 보복 폭행 사건에 비할 바 없이 질 나쁜 범죄행위인데도 엘지측은 패소한 뒤 반성은커녕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라고 개탄했다. 그는 앞으로 원상회복한 기술을 본격적으로 상용화하는 것은 물론 엘지를 상대로 휴대전화 긴급구조 서비스에 대한 특허 사용료 청구와 함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낼 계획이다.

“휠체어 타고 정몽구 회장 찾아갈 것”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모비스에 중기계 부품을 납품하다 부도난 중소기업 정신산업 이인애 사장(72) 역시 7년간의 지난한 싸움 끝에 가까스로 이긴 경우다. 대한중재상사원은 지난 7월4일 현대측에 이씨에게 18억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인애 사장은 이미 회사와 자택을 포함해 2백억원대 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지난해 11월8일 피해 구제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던 과정에서 현대측이 동원한 사설 경호원들에게 폭행을 당해 10개월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시사IN 한향란현대측에 납품대금 정산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폭행당해 10개월째 입원 중인 정신산업 이인애 사장.
정신산업은 현대를 만나기 전인 1999년 6월까지만 해도 알짜 중소기업으로 통했다. 당시 이인애 사장은 현대정공 박정인 대표(현재 현대차 수석부회장)와 오스트리아에 수출할 화물열차에 장착하는 리프팅 장치 하도급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정공은 정신산업과 계약한 후 추가 발주 약속을 조건으로 45억원이던 납품 가격을 32억4천만원으로 깎았다. 그러나 현대측은 이후 추가 발주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설계변경을 자주 해가며 추가 비용을 정신산업에 떠넘겼다. 그나마 이미 납품한 물품 대금도 제때 정산해주지 않아 결국 정신산업은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2000년 8월 부도 처리되고 만다.

이후 그녀는 7년 동안 골리앗 현대를 상대로 소송과 진정 등 갖은 피해구제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강한 힘을 동원한 현대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인애씨는 2005년부터 최초 계약 당사자인 박정인 현대차 수석부회장 자택(경기도 분당)과 현대차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책임을 따졌다. 박 수석부회장 자택 앞 시위가 1년여를 맞던 지난해 11월8일, 급기야 현대 계열사 로템에서는 사설 경비용역원을 동원해 이인애 사장에게 ‘다시는 1인 시위를 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충돌을 자행했다. 또 현대측은 기업분쟁을 조정하는 대한중재상사원에 이 사건을 제소했다. 아무 책임이 없다며 현대가 앞장서 끌고 간 이 분쟁에 대해 대한중재상사원은 이례적으로 지난 7월4일 현대에 18억8천만원을 변상하라고 결정했다.

폭행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로템의 현장 지휘 간부를 벌금 1백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그러나 현대측은 이인애 사장의 병원비 3천만원에 대해서 아직까지 단 한푼도 변상하지 않고 있다.

이인애 사장은 중재상사원에서의 일부 승소를 토대로 2백억원대 부도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승소 결정 나흘 후 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7월8일 병원에 입원 중이던 이인애씨의 서울 잠실 옥탑방과 창고가 괴한들의 침입을 받아 털린 것이다. 그 안에는 현대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각종 증거품과 서류상자 7개가 보관돼 있었다. 이씨의 신고로 현재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송파경찰서 경찰관은 “누군가 외부 세력이 문을 뜯어내고 교묘하게 서류만 훔쳐갔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에서 지문을 채취해 분석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단서는 확보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현대측이 사주한 자들의 서류를 훔쳐갔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인애씨는 병원으로 찾아간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몽구 회장이 구속된 뒤 8천7백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고 풀려났는데 먼저 나 같은 피해 중소기업인에게 납품대금이나 제대로 갚아야 한다. 정 회장이 출소했다니 그가 출근하는 대로 휠체어를 타고라도 사옥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할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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