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역으로〉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
〈근대혁명사상사〉(을유문화사, 1962),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실천문학사, 1990), 그리고 바로 이 책 〈핀란드 역으로〉. 각각 1960년대 초, 1980년대 말, 그리고 21세기에 나온 이 책들은 같은 책의 다른 번역본이다. 원제가 ‘To the Finland Station’이니 40여 년 만에 본래 제목을 찾았다. 여기에서 핀란드 역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핀란드 행 열차의 역을 뜻한다. 1917년 4월 레닌이 귀국할 때 바로 핀란드 역에 도착해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사자후를 토했다.

프랑스 역사가 줄 미슐레가 이탈리아 사상가 비코를 재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핀란드 역에 이르는, 그러니까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되기까지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다룬다(예전 번역본 제목들도 일리가 있는 셈). 그 인물이란 미슐레, 비코, 르낭, 텐, 아나톨 프랑스, 바뵈프, 생시몽, 푸리에, 오언, 마르크스, 엥겔스, 라살, 바쿠닌, 레닌, 트로츠키 등이며, 책에서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역사는 낭만과 열정과 공상과 유토피아와 음모와 유혈과 혁명이 뒤엉킨 소용돌이 그 자체다.

책도 책이지만 저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 비평가 유종호가 윌슨의 〈악셀의 성〉(문예출판사, 1997)을 가리켜 ‘20세기 서구 문학 연구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윌슨은 저명한 문학 비평가, 문학사가 그리고 작가다. 또한 윌슨은 미국 지성사에서 사실상 마지막 독립 지성, 즉 제도권 아카데미즘에 투항하지 않은 마지막 지성으로 평가받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재야 문사(文士)’라고 할까.

“러시아 인텔리겐차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옹골진 성격과 능력, 근면함 등은 독일 혈통에서 물려받은 게 분명하다. 러시아 사람은 보통 정서적이나 도덕적으로 주체를 못할 양극단을 오락가락해서-연극에는 어울리지만 실제 행동에는 좋지 않다-심지어는 톨스토이같이 위대한 러시아인도 서구 사람이 보기에는 약간 우스꽝스러울 정도인데, 도덕적으로 일관된 블라디미르의 태도는 이것과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

윌슨, 이데올로기의 정부(情婦)에 넋 빼앗겨

레닌에 대한 위와 같은 일종의 인물 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윌슨은 방대한 관련 자료의 섭렵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다분히 인상파스러운 태도를 보여준다. 줄 미슐레에 대한 묘사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다음 인용은 부분적으로 윌슨 자신을 묘사하는 말로도 적합할 듯하다.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와 군중에게 연설하는 레닌. 윌슨은 다분히 인상파스러운 태도로 레닌 등을 분석한다.
“미슐레는 여러 면에서 평범한 역사가보다는 발자크 같은 소설가에 견줄 만한 사람이다. 미슐레는 소설가다운 사회적 관심과 인물을 파악하는 능력, 시인다운 상상력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특성은 동시대의 삶에 자유롭게 발휘되는 대신, 독특한 우연의 결합에 의해 역사로 돌려졌고 학문적 사실 탐구욕과 결합되어 미슐레를 열정적인 연구로 몰고 갔다.”

1960년대에 나온 번역본을 읽은 그 시대 독자들은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보았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 나온 것을 그때 읽은 독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며 또 다른 느낌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나온 이 번역본은? 한 편의 장대한 대하 드라마? 그러나 분명히 대하 드라마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찾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겠지만, 책의 부제목에 단서가 있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그 탐구를 행한 윌슨 자신도 ‘역사를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영문학자 루이스 매넌드의 말대로 윌슨은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고립된 인물들의 모습을 이렇게 닮아 있었다. “온통 뒤죽박죽인 집에서 끊임없이 글을 썼고,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부인은 병들었고, 아이들은 쉴 새 없이 기어오르고, 집세 징수인은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내면의 시선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정부(情婦)인 역사에 넋을 빼앗긴 채 골몰해 있었다.”

기자명 표정훈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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