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문정우 대기자입니다
“앞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뵙겠습니다."

 
작취미성. 며칠 전 아침에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는데 아내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 리영희 선생님.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선생님이 나오신 것입니다(그로부터 며칠 뒤 신년 특집에도 나오셨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이 어쩐 일로 나오셨대?”

아내에게 물으니 “선생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가  반짝 베스트셀러에 올라 화제가 됐다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다 보니, 파시즘에 대해서 쓴, 제가 대학생 시절인 무려 30년 전에 읽은 선생님의 책이 요즘 다시 주목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모님이 많이 아프시단 소리를 들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래도 기력이 충만한 듯해 듣기에 좋았습니다. 요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원서로 다시 읽고 계시다더군요. 몇몇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나온 걸로 알고 있어서 한 질 구해서 읽어봐야지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원서를 읽고 계신다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선생님은 6·25 때 통역장교로 7년이나 복무하셨으니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와 중국어도 동시 통역 수준으로 능통하시다고 들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기자 월급이 워낙 박봉인데도, 촌지는 받기 싫으셔서 노는 날이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시느라 영어 외에 다른 외국어도 익히셨다네요. 선생님 같은 기자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인터뷰는 자연스레 책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천하의 리영희 선생님이 쥐꼬리만 한 원고료라도 받은 날이면 평소 눈여겨봐뒀던 책을 사들고 퇴근해 막바로 집안으로 들이지 못하고 대문 밖에 두었다가 나중에 집안이 조용해지면 몰래 가지고 들어가곤 했다는 대목에선 미소를 지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선생님의 어머니와 사모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혼날까 무섭기도 해서 그러셨다네요. 저도 일찍이 중학교 때 책 대여점에서 무협지를 빌려와 처마 밑 비밀장소에 숨겨놓았다가 밤이 이슥해지면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밤새워 읽곤 했는데, 음….

제가 아는 한 선생님과 견줄 만한 독서광이 없습니다. 내무부건 외무부건 기자 시절 선생님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 도서관의 거의 모든 책의 도서대출 카드에는 선생님의 이름이 빠짐 없이 적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관료든 학자든 기자든 선생님만큼 그 부처 업무를 꿰고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져옵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김중배 선생님과 그 외 다른 모든 훌륭한 기자 선배들이 모두 어김없이 독서광입니다. 김중배 선생님은 사회 활동을 스스로 거두신 지 꽤 되지만 지금도 신간을 빠짐없이 읽고 계셔서 현역 때나 다름없이 말과 생각이 잘 벼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 최근 선생님을 뵀던 지인들의 전언입니다.

저는 리영희 선생님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문득 책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책을 정말 좋아하는 선배들이 들으면 하품이 나올 얘기지요. 그래도 제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직장(저는 그 잡지의 이름을 입에 담기 싫어서 꼭 이렇게 부릅니다. 아직도 문을 안 닫았느냐고 묻는 분이 계시는데 유감스럽게도 버젓이 나옵니다)에서 2년 반, 〈시사IN〉을 창간하고 1년간 편집장 혹은 편집국장의 편지를 쓰느라, 그리고 요 몇 달 동안은 단행본을 내느라 억지로라도 열심히 책을 읽은 덕분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책을 읽고 공부하며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도 잠시 방향을 잃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라는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서평 전문기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그 친구가 이런 말도 했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책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집에 있는 것처럼 안전하다는 자신감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은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담하건대 ‘김국’은 정말 몸꽝입니다. 여기서 ‘김국’이란 〈칼의 노래〉 〈남한산성〉, 그리고 최근에는 〈공무도하〉란 책을 쓴 그 소설가를 말합니다. 요즘 버스 옆구리에서 대문짝 만하게 웃고 있어서 소스라치게 만드는 바로 그 분입니다. 그분은 전 직장에서 편집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후배들은 지금도 그를 ‘김국’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존경의 표시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나왔던 ‘김간’ 정도의 느낌이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아, 〈솔약국집 아들들〉을 안 보셨다고요? 괜찮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아니니까요.

김국이 말은 무시무시하게 합니다. 가령 자신이 닭싸움을 할 때면 마치 독수리가 상공을 선회하듯 몇 차례 공중에서 돌다가 적의 정수리를 쫀다거나, 100m 달리기를 할라치면 자기의 뒤로 일진광풍, 회오리 먼지가 일어나 눈을 뜰 수 없게 만든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오랜 동안 그와 함께 생활해온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가 자기 앞으로 천천히 굴러오는 공 하나도 의도한 대로 제대로 못 차내는 몸치라는 것을. 놀랍게도 그런 그가 〈자전거 여행〉이라는 훌륭한 책을 썼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직함을 ‘자전거 레이서’로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대 담당 기자를 당혹스럽게 한다더군요. 이 〈자전거 여행〉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이 화석 연료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 씹어 먹어 소화한 영양분을 태워가며 천천히 여행을 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전국에 걷기 열풍을 불러온 제주 올레길을 개척한 서명숙 이사장 스토리는 더욱 극적입니다. 이분도 제 전 직장의 편집장을 지냈는데 제가 알기로는 거의 40대 초반까지도 북한산은 고사하고 남산이나 안산 정상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채 300m도 안 되는 회사까지 택시를 타고 오는 것을 후배들에게 몇 차례나 목격당한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녀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북한산에서 날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더니 급기야 산티아고 길을 40일이나 걷고 와서는 제주 올레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수십억, 수백억원을 들였어도 제주도 관광객은 줄어들기만 했으나 올해 그녀는 수십만명을 제주 올레길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녀가 제주 올레길을 개척한 경험을 쓴 〈놀멍, 쉬멍, 걸으멍〉은 어느덧 여행 서적 베스트셀러 자리의 붙박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선무당의 성공 사례가 있기에 저도 책 이야기를 써볼 엄두를 냈습니다. ‘다행히’ 저는 현장 기자로 있던 오랜 동안 책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분 눈에는 어이 없어 보이겠지만 그래서 저는 요즘 읽는 책 한 권 한 권이 신기하고 새롭습니다. 몸치가 몸을 놀리는 무한한 즐거움에 푹 빠지듯, 중이 고기맛을 본 듯 저도 요즘에는 책에 푹 빠져 지냅니다.

책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염치가 없어서입니다. 지난번 첫 책 〈거꾸로 희망이다〉를 내고 나서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나 알라딘의 판매지수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다른 출판사처럼 빵빵 광고를 낼 수 있는 처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여러분께 ‘〈시사IN〉 문정우 대기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분이 책을 사주셔서(욕을 하신 분도 있었고, 사실 욕먹어도 쌉니다) 초기에 베스트셀러에 뛰어오를 수 있어서 책을 제법 팔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러분께 책에 관해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보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제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자, 이제 저와 함께 책 여행을 떠나시지요. 이 여행이 재미있을지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전문 평론가의 글보다는 격이 떨어질지도 모르지요. 다만 준비하는 이 순간이 즐겁습니다. 여행은 정작 떠났을 때보다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짐을 꾸릴  때가 더욱 신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앞으로 여러분께 소개할 책 수십 권을 지하 창고 책장에 모셔다 놨습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제 마음도 설렙니다. 사실 이 천박한 시대에 달리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 빵꾸똥꾸와 아이들’을 욕하고 화내며 세월을 보내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케케묵은 이념과 냉전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치기 신자유주의자 흉내나 내는 그들도 사실 가련한 인생입니다. 맹자란 분이 그러셨다지요. 운이 따를 때에는 세상에 나아가 좋은 일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너 자신을 닦으라고. 자 이제 저하고 더 넓고 흥미진진한 세계로 눈을 돌립시다. 책을 읽기 싫으시면 그냥 제 얘기만 들으셔도 됩니다. 첫 번째 책은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아 참, 저희 세 번째 책 〈굿바이 사교육〉이 서점에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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