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싱그러운 시작이었다.” 요즘 앞의 몇 쪽을 읽다 마는 책이 더 많아졌다. 영국 작가 에이단 체임버스의 청소년 소설은 처음부터 좋았다. 어느 ‘기념식’에 참석하러 네덜란드를 방문한 영국의 풋내기 청년 제이콥 토드(3세)는 암스테르담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또래 남자를 여자로 착각해 넋이 빠졌다가 노천 카페에 벗어놓은 점퍼를 날치기당한다. 귀인을 만나 무일푼의 곤경에서 헤쳐나오지만, 그건 약간 뜸을 들이고 나서의 일이다.

제이콥의 암스테르담 신고식 다음에는 그의 네덜란드 할머니 헤르트라위가 영국 손자에게 주려고 작성한 회상록 도입부가 이어진다. 시작부터 인상적인 A4용지 125쪽 분량의 헤르트라위 이야기는 제이콥의 좌충우돌한 경험과 불규칙하게 번갈아 나온다. 헤르트라위의 회고는 제2차 세계대전 막판, 영국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의 네덜란드 아른헴 전투가 배경이다. 연합군의 참담한 패배로 기록된 낙하산 강하작전은 영화로도 다뤄졌다.

 ‘앤서니 홉킨스가 씩씩한 장교로 나오는’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 1977)는 국내 개봉이 일렀다. 1970년대 후반, 그때는 트럼프 카드만 한 크기의 ‘영화 홍보 캘린더’를 모으는 게 유행이었다. 영화 포스터 뒷면에 달력이 있었는데, 나는 〈머나먼 다리〉의 캘린더를 갖고 있었다. 〈머나먼 다리〉는 호화 배역을 내세웠다. 라이언 오닐, 로버트 레드포드, 진 해크먼, 숀 코너리, 리브 울만, 맥시밀리언 셸, 로런스 올리비에 같은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그때만 해도 앤서니 홉킨스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소설에 인용된 무명 장교의 수기에 따르면 아른헴 전투는 연합군 지휘부의 과시욕이 가져온 비극이다. 네덜란드 할머니 이야기는 여기서 접는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체임버스는 뭘 굳이 감추지 않는다. 실마리와 복선은 다 드러나며 앞으로의 전개는 얼추 짐작할 수 있다. ‘피를 간질이는 무언가’를 출생의 비밀 파헤치기로 다가서지 않은 것은 큰 미덕이다.

나는 제이콥의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그는 정확성을 고집하고 탐욕적인 만남을 혐오하며, 늦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그를 감싸기는커녕 책벌레의 따분한 속성, 나약함의 한 증거, 태생적 겁쟁이로 평가절하한다. 또 그의 얼굴에는 속생각이 다 드러난다. 행운과 인연도 별로 없다. 줄서기는 너무 싫다. 결국 아버지는 제이콥이 축구를 인생의 중대사로 여기지 않는 것도, 목공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삶에 대한 ‘성찰 혹은 통찰’ 가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참패한 아른헴 전투를 다룬 영화 〈머나먼 다리〉의 한 장면.

책에는 삶에 대한 성찰 혹은 통찰이 가득하다. “나처럼 게이임을 감추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암스테르담과 같이 다른 곳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우호적인 곳에서조차 사람들 행동을 재빨리 알아채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면 그렇게 하게 돼 있어.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위험 신호 읽는 법을 배워야 돼.” 소수자, 약자, 가난한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 땅의 현실은 더 말해 뭣하랴!
번역도 뛰어나다. 대체로 번역서 읽기는 두세 배 수고롭다. 이 작품은 웬만한 국내 작품보다 잘 읽힌다. 번역 시는 대개 싱겁다. 번역자가 우리말로 옮긴 벤 존슨의 작품은, 로버트 브라우닝(아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연애 시 한 편과 브레히트의 서정시 몇 편처럼 팍 꽂힌다. “영국 곳곳에 포진된 8곳의 영국 비행장과 14곳의 미국 비행장에서” ‘영국 비행장’을 ‘영국군 비행장’으로, ‘미국 비행장’을 ‘미군 비행장’으로 고치면 이 책의 번역은 거의 완벽하다.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모임’ 같은 데서 이 책을 청소년에게 권하면 좋으련만, 그랬다가 ‘아우데르베츠(ouderwets:구식을 뜻하는 네덜란드 어)’한 ‘구식(舊式)’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참. 제이콥 토드(3세)는 젊은이로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성년식을 치른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는 로맨스 랜드다.

기자명 최성일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