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생각한다〉 저자는 도시인에게 “산책하라”고 권한다. 위는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에서 걷는 사람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변화를 도시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 적이 있다. 고대의 시간과 중세 그리고 현대의 시간이 도시의 건축물 안에 잡거하는 것처럼 언어 역시 그렇게 누적된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동시적 현존이라는 이 도시의 비유는 서울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사실 서울은 기억 상실의 도시다. 서울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만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언제든 미래를 향해 밀려나면서 잿더미로 솟아오르는 끝없는 파괴의 흔적을 거느리고 있다.

오늘의 서울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한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한 도시다. 그러나 기억의 파괴는 전쟁만을 통해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근대화 프로젝트에 기반한 서울의 도시계획과 재개발,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행되는 도시디자인 프로젝트는 서울의 기억상실증을 더욱 깊게 한다. 근대화 역시 전쟁의 연장인 것이다.

산책에 대한 몽상으로 충만한 인문지리서

특정한 공간이 인간의 실존적 의식과 내연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장소의식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러한 장소의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끝없는 파괴와 건설만이 지속되는 대도시에서 인간의 삶이란 그런 건축물의 운명과 비슷하게 파괴되기는 하지만, 새롭게 개조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는 난민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난민에 가까운 일상인에게 산책이란 얼마나 호사스런 몽상인가.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는 파리에 대한 책인 동시에 산책에 대한 몽상으로 충만한 인문지리서다. 파리 유학 시절을 거쳐 서울로 귀환했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간 저자에게 파리는 산책자의 몽상으로 충만한 기억의 보물창고다. 그는 파리 지도 한 장을 책상에 붙여놓고, 일용할 양식처럼 파리의 각 구역을 산책하면서, 파리라는 도시의 육체를 상상하고 관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산책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산책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목표 달성을 위한 얼음 같은 계산과 강한 성취동기는 산책자의 자질과 거리가 멀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아야겠다는 경쟁심리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산책자는 주류 질서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거리를 취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체제가 요구하는 속도를 거슬러 자신의 완만한 삶의 리듬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실용적 목적이 없는 순수한 걷기에 자기 몸의 리듬을 체화하는 일이다. 이런 리듬을 체화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파리를 찾지만, 그들은 이 박물관에서 저 미술관으로, 이 음식점에서 저 호텔로 옮겨다니며 숨 가쁜 속도경쟁을 반복할 뿐이니까.

그렇다면 파리가 아닌 서울에서 산책은 가능한가 하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물어보았다. 기억 상실의 도시이긴 하지만, 유독 서울에서만 그것이 불가능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서울 사람들은 서울을 산책의 도시로 간주하지 않는다. 지리산의 숲길과 제주도의 올레 길을 산책하는 일, 더 멀리는 남미에 있다는 순례자의 길조차도 마다하지 않고 걷는 도시인에게 서울은 무엇인가. 횡단보도 앞에서 마치 전력 질주를 기다리는 선수처럼 긴장하는 도시인의 표정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기자명 이명원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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