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어제오늘 생겨난 것이 아니다. 중세 유럽 인구의 최대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페스트, 너무 두려워서 ‘마마’라 불렸던 천연두, 비교적 최근 가장 큰 피해를 입힌 1918년 스페인 독감까지 전염병은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20세기 중반 이후 전염병 피해 규모는 줄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2002년 사스, 2005년 조류독감,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가 퍼질 때마다 세계는 실제 피해 이상으로 겁에 질렸다. 공포가 병원균을 앞지른 탓이다. 마스크를 쓰고 두려움과 의심으로 눈을 번득이며 바삐 거리를 움직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이제 감염은 현대사회 공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질병은 WHO가, 사람은 군대가 통제
상징은 문화 콘텐츠에 담겼다. 바이러스를 다룬 최근 영화나 문학작품을 보면 현대인의 공포가 보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백색 질병’이라 불리는 실명 바이러스가 도시를 휩쓸었다. 영화 〈해프닝〉에서는 바람을 매개체로 자살 바이러스가 옮아가고, 〈인베이젼〉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차례차례 인간을 ‘감정이 없는 존재’로 전염시킨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바이러스 확산으로 사람이 사라진 뉴욕을, 〈28일 후〉와 〈둠스데이〉는 비슷한 상황의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각각 배경으로 삼았다. 일본 영화 〈블레임:인류멸망 2011〉은 2009년에 창궐한 신종 독감 바이러스로 전염 7일째 4600만명 사망, 30일째 도시 기능 마비, 90일째 국가 폐쇄 조처, 2년 후 인류 멸망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통제는 사람을 고분고분하게 만든다. 특히 감염 위험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고미숙 ‘수유+너머’ 연구원은 저서 〈나비와 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경계가 내려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의료 체계의 보호를 받는다는 안도감에 자신의 몸을 맡겨버린다. 졸지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스크를 쓰게 하고 일상적 활동을 전면 보류하게 만드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은 바로 이런 권력의 배치 아래서만 가능하다.”
공포가 불러들인 권력은 파시즘 사회를 만든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문학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바이러스가 소재로 등장한다. 파시즘 정권이 지배하는 2030년 영국을 그린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지도자는 “모든 국민이 우리(정권)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느끼도록” ‘격리 지역 외곽에서 신형 바이러스로 27명 사망’ 따위의 뉴스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텔레비전 뉴스에 내보낸다. 공포로 결속한 대중은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을 기어코 만들어내고, 그 화살은 대개 약자를 향한다. 인류 멸망 후 생존자들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열차를 타고 달린다는 설정의 만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꼬리 칸 사람’들은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강화하던 1909년, 대한매일신보 10월1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시사 평론’이 실렸다. “금역순사 행위 보소 한일순사 몰려가며 괴질 검사한다 하고 배 앓는 자 두통 난 자 배고픈 자 술취한 자 분별 않고 움켜다가 피병원에 몰아간다 곳곳마다 원망하니 알 수 없다 그 순사들 상여금이 이 환일세.” 20세기 초 일본이 ‘세균 박멸’을 내세워 조선인의 신체를 지배한 것처럼, 영화 〈괴물〉에서는 미국이 한국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괴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한국 군대와 의료 시스템을 통솔했다. 권력에게는 전염병의 시대만 한 기회가 없다. 이걸 기억하는 게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만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