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20일 중국 베이징에서 최건국씨(오른쪽)가 동생 인국씨(왼쪽)을 만났다.최건국씨는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조부와 외조부는 북한의 애국열사능에 안장된 임시정부 최고위 요인,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총부리를 겨눈 국군 사단장 출신의 전 외무부 장관, 본인은 북한의 권력 실세로 변신한 어머니를 만나러 북한을 오가는 유럽의 사업가. 이 정도 되면 마치 일부러 기구하게 꼬이도록 만든 드라마의 주인공이 따로 없다. 그러나 이처럼 기구한 인생 유전을 현실 세계에서 지금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 최건국 한백상사 사장(65)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법무부장이었던 최동오 선생이며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참모총장이었던 유동렬 선생이다. 아버지는 고 최덕신씨. 어머니는 북한 권력 서열 20위 안에 드는 천도교 청우당 중앙지도위 위원장이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에 안고 사는 그를 지난 10월27·28일 베이징에서 만났다.

- 왜 당신은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는가?
=1970년대 중반 한 대기업의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이 되어 독일로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영원히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76년 아버님이 박정희 정권과 결별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부모님은 미국 망명 생활을 하면서 평양을 왕래했고 그것이 내 인생도 바꿨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내가 일하던 회사에 압력을 넣어 해고하게 했다. 회사는 나를 보호하려 했지만 당시에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이 없었다. 직장을 잃은 나는 반체제 인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독일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가운데)은 일제 식민지 시절 광복군 부대장이었으며, 박정희 정부 때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파란만장했다. 미국과 한국에 있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고 이곳 교민 사회에서도 함부로 누굴 만날 수도 없었다. 내 두 아들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1986년 4월 부모님이 북한으로 들어가신 이후에는 우리를 보는 시선이 더욱 차가웠다.

내가 제대로 직장을 얻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아내가 대신 일을 하며 상당 기간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지금 여동생 한 명이 미국에 있다. 다른 여동생과 누이, 남동생 이렇게 세 명은 한국에 살고 있다. 하지만 형제 자매들을 만날 수가 없다. 아직도 엄존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돼 있다.

-1976년 이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나?
=1998년에 와서야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을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한국의 가족들에게 해외 여행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당신이 과거 유럽에서 벌어진 한국 민주화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원래 유럽의 민주화운동은 전통이 깊다. 아버님이 서독 대사를 지냈던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는 동베를린 사건을 조작해 터뜨렸다. 주지하다시피 아버님은 이 공작에 반대했다. 하지만 일개 대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출신 민주 인사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때문에 1970년대 후반부터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려 민주화운동을 하게 됐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 적을 두고 활동했다. 돌아가신 윤이상 선생을 비롯해 정규명 박사·송두율 교수· 이종현 전 민건 의장 등이 주요 멤버였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민족통일연구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까지 평양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 요즘에는 대북 경협 사업을 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북한도 왕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한국 기업 사정을 모두 잘 아는 내가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지금은 경협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로 있다. 한라산과 백두산을 뜻하는 이름이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1986년 '북한 영주 귀국'을 선언했다. 사진은 두사람이 평양에서 관광하는 모습.
-사업이 잘되나?
요즘 한국의 대기업들이 하는 대북 사업 중에 성공하는 것들 상당수는 내가 다리를 놓아 연결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끼는 한 대기업의 북한 모래 채취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

관광 사업에도 관심이 있다. 아시아를 잘 아는 유럽인들은 백두산 관광에 관심이 많다. 관광과 요양을 겸할 수 있는 곳으로는 백두산 일원의 고원지대만 한 곳이 없다. 백두산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북쪽의 사업 승인은 이미 받아놓은 상태다.

독일의 유명한 켐핀스키호텔 체인 측과 구체적인 협의를 하고 있다. 관광객 모집에서부터 현지 숙박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을 논의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유럽 자본이 백두산에 호텔을 짓는 성과도 나올 수 있다.

이런 사업에 한국 기업들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나는 원래 정치색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불행한 가족사와 냉전 시대의 유물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색안경을 벗고 나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업가로 봐줬으면 한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에 평양에 들어갔다 왔다. 현장에서 본 분위기는 어떤가?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한측 기업들의 투자 활성화를 지켜보자는 기대 심리가 강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 큰 투자를 바란다고 한 말은 북한 주민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북 경협이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는가?
= 예상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 괜히 정상회담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일반 주민과 지도층 양쪽 모두가 기본적으로 남쪽에 대한 거부반응을 거의 가지지 않는 현상이 좋은 조짐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많이 좋아진 것인가?
=아직도 부족하나 불행한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남쪽에서 민족적인 견지에서 많이 도와주길 바란다.

-한국 정부에게 무엇을 바라나?
나는 외국에 살면서도 한국 국적을 30년 이상 유지했다. 그런데 왜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는가? 한국 국적을 가진 재외 동포로서 떳떳하게 조국을 방문해 가족을 만나고 싶다. 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일 뿐 이데올로거가 아니다.   

기자명 베이징=홍순도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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