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10월21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합동 연차총회 중 개발위원회 회의 모습.
북한과 베트남 관계가 복원되고 있어 새삼 눈길을 끈다. 10월16일부터 사흘간 농득마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당 서기장으로는 50년 만에 북한을 찾았다. 이어 북한의 김영일 내각 총리가 26일부터 기업인 30명이 포함된 대표단을 이끌고 베트남의 주요 산업시설을 견학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베트남 방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북한은 왜 이 시점에서 베트남에 주목하는 것일까. 북한과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벌인 나라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적성국 교역법을 비롯한 각종 경제 제재로 오랜 동안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공통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실종된 미군의 유해 송환 및 전쟁 포로 문제 해결 등에 적극 협조해 1995년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달성했다. 이와 함께 국제금융기구를 비롯해 서방 각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외자를 유치해 경제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베트남은 대미 관계 개선과 동시에 국제 금융기구의 도움을 받아 경제 회생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미국의 대북 정책 방향 전환과 더불어 남북한 당국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움직임과 관련해 북한이 베트남 사례에 주목할 것들은 적지 않다. 남베트남은 오랜 기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하노이가 사회주의 정권에 넘어가게 되자 많은 논란과 미국의 반대에도 세계은행은 1979년 베트남의 농업 개발을 위한 차관 지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과 다른 서방국이 인권과 관련한 압력을 넣어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관계 개선·개혁이 외자 유치 지름길

1986년 베트남 정부가 이른바 󰡐도이모이’라는 경제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하자 1990년과 1993년 사이 세계은행과 베트남 정부는 경제 정책에 관한 대화 창구를 개설했다. 이를 계기로 1993년부터 금융 지원이 시작되었다. 대미 관계 개선과 경제 개혁 조처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지원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외자 유치 물꼬를 틔운 것이다.

마침 북한도 대미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핵시설 불능화의 상응 조처인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대비해 국제 금융기구 가입 등 외자 유치를 위한 후속 조처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는 북한 정권의 숙원사업이다.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막아온 핵심 걸림돌이 테러 지원국 지정이었다. 북한이 이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의 상징을 제거하는 정치적 면도 있지만, 외자 유치의 절실한 필요성을 만족시킬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테러 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 교역법 적용은 미국의 대북한 경제 제재 및 봉쇄의 핵심 수단으로 그동안 효과적으로 기능해왔고, 북한은 이 두 가지 핵심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해 원조, 교역·투자, 금융 거래 등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제재의 해제는 북한의 정상 국가화를 향한 중대한 조처인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2006년 9월 평양을 방문했던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은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합의하고 미국이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꾀하지 않는다는 적대 정책 완화의 구체 증거를 원하고 있다. 북한은 그 사례로 미국이 세계은행이나 IMF 같은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지지해주고,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해주는 따위 방안을 예시했다”라고 당시 AP 통신이 보도한 바 있다.

미국 행정부도 북한의 이런 의도를 감지하고, 북한의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다. 해리슨의 발언이 나온 직후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같은 해 9월27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반도 문제 토론회에서 미국은 이미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와 북한을 국제 금융기구에 편입하는 문제에 대한 작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북한이 국제 금융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지원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 동결 사건으로 더욱 굳어졌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북한을 IMF 체제에 편입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북한의 달러 위조, 돈 세탁 등 불법 행위를 근절할 근본 방안을 모색하면서 나온 묘책이었다. 힐 차관보는 올해 2월28일 하원 청문회에서 “재무부가 최근 양국 간 실무협의에서 북한이 국제 금융체제에서 고립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국제 금융기구에 편입할 수 있는 방안을 조언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 국무부는 비핵화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북한을 테러 지원국 리스트에서 삭제함과 동시에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준비하도록 지원할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재무부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북한이 국제 금융의 고립 완화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처에 대해 실무회의를 통해 계속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뒤 북·미 간에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경제 접근을 통해 북한 체제의 변화를 모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미󰡐2·13 합의󰡑 이전인 2월 초순에 미국 국무부를 비롯해 국방성, 정보기관, 민간 싱크탱크의 북한 담당자 및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북한 경제개혁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평가했다. 이들은 북한의 식량 배급 시스템, 시장 작동 상황, 노동시장 및 자본시장 형성, 토지 개혁, 사유화 실태, 해외 무역의 구실, 통화․환율․금융․물가 정책 등 거시경제 관리 현황, 국가 예산 부문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향후 대응 방침을 논의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회의가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행정부가 북한의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런 심층적 회의를 갖기는 처음이다. 이들은 또한 북·중 경제 통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역시 비공개 회의에서 최대 관심사는 북한 관련 데이터 수집과 분석의 정확성 확보 문제였다.

북한이 그들의 숨통을 죄었던 BDA 사건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도 결국은 국제금융 질서에 편입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북한도 당장 훨씬 높은 수준의 합법성과 투명성을 유지해야만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정상 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궁극으로 북한이 국제금융 체제에 편입되어야 함을 뜻한다.

문제는 국제금융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이나 이후의 변화에 대해 북한이 미리 치밀하게 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했지만 북한은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 등과 함께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숙원 사업으로 삼아 왔다. 북한이 그동안 미국의 방해 책동으로 국제 금융체제 가입과 정상 은행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해온 데서도 이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뉴시스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합동 연차총회에 참석한 권오규 부총리는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국제 금융기구 가입에 대한 지지를 부탁했다.
하지만 국제 금융기구 가입은 북한에 엄청난 기회이자 도전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기회일 수도 있으나, 국제 금융기구에의 접근과 가입은 폐쇄적 자립경제에서 개방경제로의 본격 전환을 뜻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도전일 수 있다. 중국·베트남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를 개방하고, 시장 친화 경제개혁을 추진하지 않고는 IMF나 세계은행에 가입할 수가 없었다. 북한이 시장친화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국제사회와 좀더 건설적인 관계를 이루고자 할 때 세계은행은 핵심 구실을 수행한다.

중국, 베트남, 동유럽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국제 금융기구의 금융·비금융 지원을 받아 세계경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국제 금융기구 관계자들은 개혁을 통한 경제 개발은 원조와 달리 체제와 함께 일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도 비슷한 종류의 변혁을 경험하고 있는 중국·베트남·말레이시아 등을 둘러보고 빨리 배우되 개발 과정에는 지름길이 없는 만큼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한과 협력하면 시행착오 줄일 수 있어

결국 북한이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 좀더 근본적인 내부 체제 개혁에 착수해야 하는 셈이다. 핵문제 해결 진전과 북한의 숙원인 테러 지정국 지정 해제는 경제 재건을 위한 일차적 필요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내부 정책 변화를 동반할 때에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베트남을 비롯해 수많은 저개발국의 경험이 주는 변함없는 교훈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북·미 수교 조건으로 미국 의회에서는 국제 규범을 준수하는 개혁․개방 조처를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정일 지도부에는 체제 유지 면에서는 북·미 관계 개선과 국제 금융기구 가입이 보약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북한에게는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달리 같은 민족인 남한이 존재한다. 남·북한이 협력하면 북한은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이른바 󰡐후발자의 이점󰡑을 기대할 수도 있다. 국제 기구 관계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 󰡒북한으로서는 다른 체제 전환국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휼륭한 자원을 가졌다. 그것은 남한의 개발 경험과 경제력이다. 이런 자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자신들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그 개발의 효과는 남·북한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지난 10월22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WB) 연차총회 기조연설에서 “두 국제 금융기구는 북한의 가입에 대비해 사전 준비 작업에 착수해야 하며 회원국 지지를 부탁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번 6자회담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국제사회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은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기 위한 회원국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이처럼 북한의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적극 지원하는 배경에는 당장 남북 정상이 합의한 경제협력 사업을 좀더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재원 조달의 필요성 등이 부쩍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북한이 안심하고 개혁에 나설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도 시급해 보인다.

기자명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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