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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진면목 잘못 알려졌다

<윤봉길 평전>을 펴낸 이태복 전 장관(사진)은
“윤봉길 의사는 주체적인 독립전쟁 선포 의지로
상하이 의거를 일으켰으며, ‘백범 김구의 행동대원
프레임’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9년 05월 02일 목요일 제6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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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폭탄, 백범 김구의 행동대장, 효창공원 묘지. 윤봉길 의사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미지다. 흔히 알고 있는 이런 내용이 정말 사실일까?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을 오가며 윤 의사에 대한 새로운 실증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잘못을 지적하는 이가 있다.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 87주년을 앞두고 <윤봉길 평전>을 펴낸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이 전 장관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잘 몰랐던 윤봉길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그는 예산중학교 2학년 시절 굴욕적인 한일회담 규탄 시위와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날을 ‘군민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윤 의사의 가르침을 평생 신조로 삼게 되었고 이번에 평전을 냈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단상에 던진 폭탄은 알려진 대로 진짜 도시락 폭탄이었을까? 아니다. 사실은 물통 폭탄이었다. 물통 폭탄을 던져 거사에 성공한 뒤 준비해온 도시락 폭탄은 꺼내지도 못하고 체포됐다. 또 윤 의사가 광복 후 효창공원에 묻힌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가묘이고 실제 유해는 아직도 일본 형무소 인근 지하에 매장돼 있다.”
ⓒ시사IN 윤무영

사소한 문제로 보이지만 우리는 윤봉길 의거에 대해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의 간극’만큼이나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게 이 전 장관의 인식이다. 그는 특히 ‘김구의 행동대원 윤봉길’이라는 프레임이 대표적인 허구라고 꼽는다. 널리 알려진 4월29일 상하이 폭탄 투척 의거에서 윤봉길 의사의 ‘주체적인 독립전쟁 선포’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안중근 의사에 이어 최대의 의열 투쟁을 했다. 그런 윤 의사를 후세가 ‘김구의 행동대원’ 정도로 묶어두는 것은 윤 의사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역사적 진실도 아니라서 분명히 밝히고 싶었다.”

이 전 장관은 이를 밝히기 위해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중국 쪽 자료는 물론 1933년 중국에서 발행된 <윤봉길전>이라는 중국어판 소책자를 입수해 분석했다(이 책은 2017년 <나의 친구 윤봉길>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이 책에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상하이 행적, 그리고 심경 등이 중국어로 기록되어 있다. 의거 1년 뒤인 1933년 중국에서 이 책을 펴낸 이는 황해도 해주 출신 김광이었다. “김광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상하이 거주지 2층에서 윤봉길 의사와 8개월 동안 함께 지낸 이였다. 김광은 거사 전 윤 의사로부터 25년 짧은 생애와 의거를 앞둔 각오를 구술받았고, 거사 직후 이 책을 펴냈다.” <윤봉길전>은 윤봉길 의사의 자서전에 가까운 책인 셈이다. 윤 의사가 거사 직전 김광에게 구술한 짧은 생애는 ‘야학 교사-농촌계몽 운동가-시인-모자공장 노동자를 거쳐 독립투사’로 이어지는 삶이다.

“부모 형제의 사랑보다 더 강의한 사랑 있다”


윤 의사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젊은이로서 부모 형제의 사랑보다 강의(剛毅)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출발해 중국 상하이까지 갔다. 가는 길에 독립운동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농민계몽과 노동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일제의 만행으로 도랑에 시체가 가득한 모습을 보고 목숨을 던져야겠다고 결단했고 실행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던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늦은 입학을 했다. 이듬해 3월3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예산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했다. 하굣길에 그는 읍내 곳곳에서 마을 어른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에 구타당하고 짓밟히는 광경을 보았다. 이 충격으로 윤 의사는 “일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라고 부모에게 선언하고 자퇴했다.

1921년부터 옆 마을에 사는 성주록 선생이 개설한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에서 사서삼경과 한시를 공부했다. 이때부터 그는 시문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윤봉길은 한학을 배우면서도 1920년 창간된 천도교 계열의 민족잡지 <개벽>을 구해 읽으며 새로운 사조에 눈을 떴다. 열다섯 살이 되던 1922년 배용순과 결혼했다. 1926년 서숙 생활을 마친 뒤 농촌계몽 운동에 뛰어든다. 오치서숙 동문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사랑방 야학을 개설해 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윤봉길은 이곳에서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농민 독본> 3권을 저술했다. 1928년에는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하기도 했다.

1929년 “자급자족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월진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윤봉길은 거사 전 김광에게 월진회에 대해 “조선 독립을 위해 농민들을 조직하고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라고 회고했다. 월진회 발족 당시 회원은 38명이었으며, 매월 10전씩을 회비로 거뒀다.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 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 사업 추진 및 청소년 체육 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윤봉길은 1929년 11월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 전환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930년 3월6일 그는 ‘장부 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중국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 평북 선천에서 체포되어 달포가량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만주에 도착해 대한독립군의 김태식·한일진 등과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다.

이때 만주에 사는 동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 뒤 각지에 농민을 모아 계몽 강연을 했다. 1930년 12월 중국 칭다오로 이동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낮에는 동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 노동 강습회에 나가 활동을 했다. 중국 곳곳에서 목격한 조선인들이 겪는 억압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한시로 썼다. 칭다오에서 어머니와 네 살 난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윤봉길은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 “우리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한 사랑’이 있다고 인식하고 오로지 제 목숨을 담보로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을 택했습니다”라고 남겼다.
ⓒ연합뉴스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린 직후 일본군에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가운데).

1931년 8월 윤봉길은 드디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동안 윤 의사가 상하이에 도착한 뒤 안중근 의사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8개월간 윤봉길과 함께 생활한 김광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 거주하던 집에서 지냈다. 1층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처가 있고, 2층에는 김광과 안창호 선생 측근 이유필 등이 머물렀다.

원래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군대 조직에 들어가 독립전쟁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현실은 독립지사 대부분이 생활고에 허덕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확실한 독립운동 전망이 없어 보이는 점에 실망했다. 그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아직 혁명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으니 낮에는 공장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에 전념하면서 실력을 키우고자 했다.

윤 의사는 이때 상하이에서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종품공사’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업주의 임금 삭감에 항의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벌이다 해고당했다. “윤봉길이 노동운동과 파업을 했다는 기록은 김광의 책에 처음 나온다. 안창호와 이유필이 윤봉길을 해고한 종품공사로 찾아가 사장을 설득해서 해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뒤 윤봉길은 이유필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윤봉길, 백범에게 ‘상하이 의거’ 먼저 제안

김광의 <윤봉길전>에는 ‘1932년 일제가 10만여 병력으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자 윤봉길은 의열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키로 했다’고 적혀 있다. 김광에 따르면, 윤봉길은 1932년 3월 독자적으로 ‘혁명 계획’을 세웠다. 3월 말에는 그동안 도와준 안창호 선생과 흥사단 동지들이 다칠 것을 염려해, 김광의 거처를 나와 훙커우 공원 근처 시장에서 방 하나를 빌렸다. 여기서 동지들과 훙커우 공원 행사를 겨냥해 폭탄을 투하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했다.

윤봉길에게는 폭탄이 필요했다. 윤봉길은 백범을 만났다. 당시 윤 의사를 김구 선생에게 연결해준 인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이었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에게 4월29일 일왕의 생일 ‘천장절’ 행사를 이용해 일본군 수뇌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설명했다. 김구는 잠시 사색한 다음 “참 좋은 계획이다. 윤군에게 이 일의 계획을 일임한다”라고 말했다. 4월26일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입단선서를 하고 김구와 함께 태극기 앞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백범은 윤 의사의 거사 계획을 임시정부 각료회의에 알렸다. 각료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태복 전 장관은 김광의 이 같은 증언이 윤봉길 의거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백범일지>에 윤봉길 의거는 백범이 직접 지시했고, 거사 전까지 백범과 윤봉길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김광은 김구와 동향이며 광복군으로 백범과 함께 일할 때 이 책을 썼다.

이태복 전 장관은 지금이라도 윤봉길 의사의 주체적인 독립전쟁 선포 의지를 중심에 놓고 상하이 의거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봉길의 살신성인 투쟁 의지에 안창호 등 상하이 독립지사들의 노력, 김구의 적극적인 지원과 안내가 어우러진 독립운동사의 업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일제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등은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체포된 윤 의사는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19일 총살당했다. 스물다섯 나이였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단심제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의거 현장에서 숨진 일본군 간부는 ‘전사자’로 기록했다. 또 윤 의사의 유해를 가나자와 형무소 출입구에 파묻고 오가는 일본인이 그 땅을 밟고 다니도록 했다.

윤 의사에게는 광복 후 1946년 첫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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