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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민이 몰려온다, 고려는 어떻게 했을까

고려 건국 이후 수많은 ‘난민’이 몰려왔다.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었다. 고려는 유민을 수용했는데, 이런 포용정책은 나중에 극적으로 보답받는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1월 13일 화요일 제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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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광범위하게 퍼진 ‘단일민족’ 개념은 단언컨대 허구야. 순수 한민족이란 역사적으로, 혈연적·문화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단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의 역사를 꾸려왔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 간단히 말해 인종주의의 포로일 뿐이야. 과거 아리안족의 영광을 되뇌며 하등 민족을 멸종시켜야 한다고 악쓰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말이지. 다민족국가라고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을 연상하지만 한국 역시 만만찮은 ‘다민족국가’의 역사를 지니고 있단다. 오늘부터 몇 주간은 우리 역사에 다양한 이유로 흘러들었던 이민족과 외국인, 오늘날로 치면 ‘난민’과 ‘이민’으로 들어와 ‘한민족’의 일원이 된 이들의 역사를 들려주고자 해.

1935년 발견된 고구려의 무덤 각저총에는 두 남자가 씨름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있지. 씨름에 몰두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지금도 동네에서 마주칠 것 같은 토종 한국 아저씨인데, 상대는 쌍꺼풀에 매부리코이며 콧수염도 멋지게 기른, 영락없는 서역 사람이다. 1500년 전 씨름판의 풍경 속에서 국제적 다민족국가 고구려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연합뉴스
1935년에 발견된 고구려의 각저총 벽화. 두 남자가 씨름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런 외국인 포용 분위기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고 대내외로 선포했던 고려에도 이어졌어. 고려 건국 이후 수많은 ‘난민’이 몰려왔단다.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갈 곳을 잃은 발해의 유민들이었어. 수백 호에서 수천 호, 태자 대광현의 경우 난민 몇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몰려 들어왔어. 그 통산 합계가 12만명이 넘었다는구나. 비록 발해와 고려 사람들이 동족 의식이 있었다 해도 300만~400만 인구로 추정되는 당시 고려로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수의 유민을 수용했던 셈이야. 고려의 이런 포용정책은 극적으로 보답받게 된단다.

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는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어. 항복하고 땅을 떼어주자는 논의가 강력하게 제기되는 가운데 거란군은 안융진이라는 성을 공격했는데, 이곳을 지키던 고려군은 결사항전하여 거란군의 공격을 물리친다. 거란은 이 패전 이후 줄기차게 협상을 요청했어. 거란의 목표가 고려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게 아님을 간파한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까지 얻는 외교적 승리를 이루지. 이 안융진을 지킨 사람이 바로 대도수(大道秀), 발해 태자 대광현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어. 난민의 후예가 고려를 지킨 셈이야.

고인 물은 썩는다. 새롭게 흘러드는 물줄기도 없고 밖으로 내뿜는 물줄기 없이 ‘지금 이대로의 평화’를 고수하는 물에서 악취가 나듯, 외부로부터 자극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집단 역시 안으로부터 곪게 마련이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대동강 이남 한반도의 주인이 된 신라는 케케묵은 골품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썩은 고목이 돼갔어. 진골 김씨들이 세상을 주무르는 가운데 철저한 신분제도가 시행됐고, 당나라에서도 알아주던 최치원 등의 인재도 6두품이었기에 자신의 경륜을 펼칠 자리를 얻지 못했으니까.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선 뒤 골품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하지만 진골들 대신 등장한 호족과 외척의 발호 속에 고려 왕권은 심각하게 흔들렸고 호족과 외척들은 제 세상을 만났지.

발해 유민 12만명 포용한 고려

ⓒ연합뉴스
려 광종의 ‘신료’ 쌍기는 과거제도를 건의했다. 위는 2016년 10월에 열린 과거 시험 재현 행사.

고려 4대 왕 광종이 즉위할 즈음 중국은 ‘5대 10국’ 시대라 해서 나라가 일어서고 스러지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혼란기였어. 그런 나라들 중 하나였던 후주(後周)에서 사신단이 왔는데 그중에 쌍기(雙冀)라는 사람이 있었지. 다른 사신단이 돌아갈 때 쌍기는 병들어서 따라가지 못했어. 병을 치료하는 기간 쌍기는 고려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겠지. 쌍기라는 사람이 상당히 학식이 깊고 식견이 있다는 소문이 고려 광종의 귀에 들어갔나 봐. “광종이 그를 불러 대화하니 뜻이 맞았다. 광종이 그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에 표를 보내 신료로 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등용하게 되자 갑자기 원포(元浦)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순서를 넘어 옮기고 한 해도 안 되어서는 문병(文柄)을 잡게 하니 당시의 여론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고려사>).”

고려 신하들이 지나치다고 눈살을 찌푸릴 만큼 광종이 쌍기에게 흠뻑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당시 광종의 정치적 목표는 “첫째,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닦고 둘째, 합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인재 교육과 선발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어(한정수, <광종이 쌍기를 만났을 때>, 한국역사연구회). 쌍기는 거기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거든. 바로 과거제도야.

귀족의 후손이면 자동으로 벼슬에 올라 자자손손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시절,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쳐서 합격자들에게 관직을 내린다는 과거제도가 고려 사회에 어떤 충격을 몰고 왔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뭐라고? 나더러 시험을 보라고?” 부르짖은 젊은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았겠니. 고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중국인이 지공거(知貢擧: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돼서 관리를 뽑고 인재를 가려내는 모습에 배알이 뒤틀린 호족 나리들이 좀 많았겠니.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고려 귀족들의 쌍기에 대한 평가는 어딘지 모르게 싸늘하다. “쌍기와 같은 재주 없는 이들을 갑자기 등용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최승로).” “부화(浮華)의 문(文)(가볍고 화려하기만 한 글재주)을 주창하여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이제현).”

시행착오도 물론 있었을 테고,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한 중국인 관료들(40여 명에 달했다고 해)에게 나눠주었다는 광종의 외국인 우대 정책에도 불만은 많았을 거야. 하지만 실력 있는 이들을 공정한 시험을 통해 선발한다는 과거제도 자체를 비난한 사람은 없었단다. 쌍기에 이어 송나라에서 귀화한 왕융이 과거 시험의 주무관으로 활약하면서 고려의 과거제도는 튼튼하게 뿌리내렸어. 958년 쌍기가 과거 시험을 처음으로 주관하고 합격자를 뽑은 이래 1894년 갑오개혁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기까지 936년간 과거제도는 나라의 근간으로 기능했으며, 유명무실할지언정 끊기지는 않았어. 심지어 오늘날조차 국가‘고시’의 형태로 오래된 흔적을 남기고 있지.

목은 이색은 이 이방인들의 공적에 대해 조금은 인색하게, 그러나 진솔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구나. “어찌 쌍기, 왕융이 얕은 식견으로 우리 문풍의 시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쌍기와 왕융이 후생들을 인도하여 도와줌도 역시 지극하다 할 것이니… 하찮은 백성들까지도 모두 과거의 자랑스러움을 흠모하여 그 자제들을 힘써 권면하여 반드시 성취하게 했으니 이것이 반드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점점 교화되어 집집마다 책을 읽어 과거를 보아 세 아들 다섯 아들이 모두 합격함에 이르렀으니 쌍씨, 왕씨의 공로가 크도다(이혜순, <고려 전기 한문학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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