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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서늘해지고 어쩐지 사무치는

양경언 (문학평론가·<문학3> 기획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7월 20일 금요일 제5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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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파이팅.’ 필자 중 한 명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다행히 여름은 문학과 친한 계절이다. 극단적인 날씨, 몰입하기 좋은 소설이 특히 그렇다. 올해도 여름을 앞두고 많은 소설이 출간되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한국 소설 여섯 권을 소개한다. 문예지를 만드는 작가·평론가·시각문화연구자가 각각 삶을 버티게 하는 소설, 나 자신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소설, 끔찍함을 보여주는 소설을 추천해왔다.



나는 작품 앞에 있는 독자를 사람으로 대접하는 소설에 매력을 느낀다. 사람이라는 말이 짊어지는 무수한 한계에 등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게 만드는 힘을 길러주는 소설에 신뢰를 보낸다는 얘기이다. 생각해보라. ‘사람다운’ 꼴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혹은 사람이기 위한 조건을 따지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매섭고도 외로운 일인지를. 어떤 소설은 웬만해선 감추고 싶지만 도무지 없앨 수 없는 과오마저도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사람을 상투적으로 대하는 세계에 저항한다. 그런 일을 해내기 위해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을 견디곤 한다. 그러한 순간에 이들이 느꼈을 부끄러움이나 혼란은 거기에 접속한 독자들의 삶과 연동하면서 우리가 사는 방식을 돌아보게끔 이끄는 매개가 된다. 자기 자신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인물을 담아내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어엿해질 수 있는 통찰의 경로를 얻는다. 이기호와 최은영의 소설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이기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이기호의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비유하자면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끼얹는 찬물과도 같다. 책에 담긴 일곱 사람을 만날 때(이기호의 네 번째 소설집인 이번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고유명사가 포함된 제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독자는 키득거리며 책을 붙잡고 있다가도 문득 자신의 가슴께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오는 순간을 맞이한다. 소설들을 어떤 순서로 읽어봐도 나름의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은 되도록 첫 번째로 배치된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시작해 책이 구성된 차례대로 읽기를 바란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쓴 소설이 중고품 구매 사이트에 싼 가격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그때부터 온갖 생각에 시달리는 소설가 ‘이기호’가 등장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독자 처지에서는 작가가 먼저 무장해제를 하고 이야기 세계에 입성한 것으로 여겨져서다.


이번 소설집에서 거듭 등장하는 소설 쓰는 ‘이’가 곧 소설가 ‘이기호’이고, 소설은 작가의 경험담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굳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때의 효과일 테다. 이기호 소설의 관심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잘 살아보겠다고 서로를 향해 주고받는 언어, 혹은 하나의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조명하는 언어와 같은 것이 빈번히 진실을 놓치는 모양새로 자리하는지에 있다. 그 진실이 사소한 말, 안다고 자부했으나 알 수 없을 누군가의 영역, 내가 나를 변명하기 위해 마음껏 행했던 자기기만을 이음새 삼아 드러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기호의 소설은 진짜 같은 가짜 속에서 가짜나 다름없는 자기 자신을 통해 기어이 진짜를 건네는 방식을 감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만큼이나 솔직함에 모든 걸 다 건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소설을 막 읽은 뒤 나는 어쩐지 서늘한 마음이 되어 책을 앞에 두고 오래도록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최은영의 소설을 향한 다정한 찬사에 언급되는 ‘선하다’는 표현을 두고 생각에 잠기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바깥에 적을 상정하여 혐오를 투사함으로써만 겨우 자기 존재의 지탱이 가능한 이들에 대한 소식이 뉴스를 장식하는 시대에 소설이 남긴 선한 인상은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인가. ‘선함’이란 말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강요되고 있는 성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혹은 그 누군가를 ‘싸울 줄 모르는 상태’로 길들이기 위해 꺼내든 당근에 해당하는 표현임을 인지한다면, 그때도 선함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쓸 수 있을까. 


최은영은 그 선함이라는 말이 어떤 인물에게 부여되는 순간, 그가 세상에 받아들여지기까지 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짚어내는 작가다. 요컨대 최은영의 소설에서 인물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왜 지금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는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살핌으로써, 자기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어긋났던 관계까지도 제대로 바라보려 한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을 떠올릴 때 으레 형성되는 관습적인 형상화 역시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 꼬여 있지 않은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는 일은,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징그러운 진실마저도 눈을 맞춰야 하는 고통이 뒤따를지언정,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립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절차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폭력적인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처절하게 스스로와 투쟁한 시간의 기록이다. 이 고요한 싸움의 과정을 통해서야 들리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설 속 어린 인물들이 견뎠던 시간이 마냥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이만큼이나 집요하게 성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발을 딛고 서 있으려는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소설을 막 읽은 뒤 나는 어쩐지 사무치는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을 오래도록 안아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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