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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에 담은 시절이 역사가 되었다

제100호 발간을 앞둔 계간지 <황해문화>는 1993년 창간 이래 25년간 우리 사회를 직시해왔다. <황해문화>가 지속할 수 있는 밑바탕에는 새얼문화재단이 있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8년 07월 12일 목요일 제5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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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호가 나온 뒤 전성원 편집장이 <황해문화>를 발행하는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에게 말했다. “늦었지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이번 호에 최영미 시인의 시를 실었습니다.” 내용을 본 지용택 이사장이 말했다. “이 사람아, 좀 빼지 그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2017년 겨울호 특집은 ‘젠더 전쟁’이었다. 특집 필자는 물론 시, 소설, 포토에세이 작가도 전부 여성으로 꾸렸다. 창간 이후 처음으로 창작 코너 작가들에게도 ‘페미니즘과 젠더’라는 특정 주제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최영미 시인이 문제의 작품을 보내왔다.

ⓒ시사IN 이명익
<황해문화> 1~99호가 쌓인 ‘기념탑’을 중심으로 새얼문화재단 임직원들이 모였다. 앞줄 왼쪽이 지용택 이사장, 뒷줄 맨 왼쪽이 전성원 편집장이다.
<황해문화> 편집진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용택 이사장이 편집 방향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 이사장과 고은 시인은 막역한 사이였다. 연배가 비슷한 데다 새얼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강연자와 심사위원으로 고은 시인이 참여해왔기 때문이다. 편집주간인 김명인 교수(인하대 국어교육과)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이도 고은 시인이었다. 그럼에도 편집진은 편집 방향에 비추어 최 시인의 작품을 싣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만장일치로 게재를 결정했다. 올해 초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폭로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영미 시인의 ‘괴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황해문화>는 특별한 잡지다. 한 번도 인천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 늘 우리 사회 전체를 직시해왔다. 가장 최근호인 제99호는 ‘재판 거래’ 의혹을 예견이나 한 듯 사법부를 비롯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1993년 창간한 이래 25년 동안 쉼 없이 걸어왔다. 올여름이면 어느덧 제100호(2018년 가을호)를 내놓는다.

<황해문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새얼문화재단을 알아야 한다. 1983년 창립한 새얼문화재단은 <황해문화> 편집부 2명을 비롯해 전체 임직원이 8명인 작은 민간 문화재단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과 의의는 여느 유명 문화재단에 못지않다. 초·중·고교 학생과 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새얼백일장, 역사 기행, 가곡과 아리아의 밤, 국악의 밤 등 인천을 떠들썩하게 하는 문화 행사를 20~30년 동안 계속 열고 있다.

1986년 시작해 매달 둘째 주 수요일 아침 7시에 여는 ‘새얼아침대화’는 조찬 포럼의 효시로 불린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리영희 교수, 최장집 교수 등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이들을 초청했다. 민간 문화재단으로서 드물게 대선 후보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전성원 편집장이 “<황해문화> 만들 때가 제일 편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굵직한 사업을 많이 펼친다.

학생 5829명에게 지급한 장학금 26억원


새얼문화재단은 지용택 이사장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난 지 이사장은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전단을 뿌린 혐의로 5·16 쿠데타 이후 혁명 검찰부에 끌려갔다.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 지식인들이 대개 정치권으로 간 것과 달리 그는 인천 지역에서 자동차노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운수 노동자의 처지는 교통사고를 내면 바로 구속될 정도로 열악했다. 이들에게 자녀 학비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후원인 1200명을 모아 1975년 새얼장학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새얼문화재단의 전신이다.

ⓒ황해문화 제공
2008년 3월 <황해문화> 58호 발간 후 김명인 편집주간(가운데) 등 편집위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당시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노조 간부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노동자들이 장학회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박 대통령은 “정말로 근로자들이 장학회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거푸. 돈 있는 기업이나 만들 만한 장학재단을 노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당시 지도자는 믿지 못했다. 새얼문화재단은 2016년 12월까지 학생 5829명에게 장학금 26억1500만원을 지급했다.

새얼문화재단 사무실에는 눈에 잘 띄는 화이트보드가 하나 있다. ‘새얼후원회 현황’이다. 신규·탈퇴 회원 현황이 월별로 적혀 있다. 2018년 5월 현재 매월 5000원 이상 내는 후원 회원은 1만2541명. 43년 전 후원회원 1200명으로 시작한 회원 수가 1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황해문화>를 발간하고, 여러 문화 사업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서규환 교수(인하대 정치외교학)는 <새얼문화재단과 헌신의 리더십>이라는 논문에서 기존 시민사회단체의 문제점을 하부 조직의 빈곤, 언론 중심 활동, 서울 중심, 탈물질주의 가치 지향의 약세 등으로 꼽으면서 새얼문화재단이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평했다. 여기에 더해 투명한 재정 관리, 평생직장 개념(1996년부터 일한 전성원 편집장이 오래 일한 순서로 네 번째밖에 안 된다), 지용택 이사장의 헌신 등을 새얼문화재단의 장점으로 꼽았다.

본디 <황해문화> 제100호 발간을 맞은 이번 인터뷰는 지용택 이사장을 초점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지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팔순 넘은 노인 이야기를 들어서 뭐하겠느냐”라며 손사래를 쳤다. 100호를 만드는 동안 전 직원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이 없다며 본인 단독 사진 대신 전체 사진을 주문하기도 했다. 다만 <황해문화>와 새얼문화재단의 장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뭐든 시작할 때는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1975년 새얼장학회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설득했는지 몰라요. 그때 당시 노동자를 위한 장학재단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낯선 일이었겠어요. 그리고 한번 시작하면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황해문화>는 6월29~30일 ‘통일과 평화 사이, 황해에서 말한다’를 주제로 제100호 발간 기념 국제 심포지엄을 연다. 마크 셀던 코넬 대학 교수, 왕후이 칭화 대학 인문학부 교수, 이시하라 슌 메이지가쿠인 대학 사회학부 교수 등 동아시아 평화 문제에 정통한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다. 과거 ‘동아시아의 지중해’였다가 이제 분단과 죽음의 바다가 된 황해에서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통일과 평화를 모색하자는 취지다.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황해문화>의 슬로건에 맞춤한 제100호 마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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